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nah Sep 01. 2023

말실수 유전자

정말 그런 게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근거 없는 믿음이지만, 시댁과 남편 그리고 아들까지, 삼대에 걸쳐 대물림되고 있는 말실수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항상 긍정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시어머님의 경우에는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실수는 하지 않으신다. 대신 맥락에 맞지 않는, 이야기 중이던 주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엉뚱한 발언을 하시거나, 이상에 버금가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말씀을 하셔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시아버님이 '그 말이 지금 왜 나와?'라고 콕 집어 냉정하게 말씀하셔도, '아, 나중에 잊어버릴까 봐 지금 얘기한 건데, 지적해 줘서 고마워요'라며 초긍정의 코멘트로 응수하신다.


반면 시아버님은, 오랜 기간 정부 기관의 고위직으로 계시며 쌓은 권위적이고 명령적인 말투를 은퇴 후 2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버리셔서, 매 번 어머님께 '난 당신 비서나 부하 직원이 아니야'라는 지적받으신다. 친구분들에게 말실수를 많이 하셔서 안 보고 지내는 경우도 많다. 그중 대표적으로는 작년에 작고하신 귀네스 아주머니가 계신다. 원래는 부부끼리 여행도 다닐 만큼 친했는데 아버님이 말실수를 크게 하셔서 그 후 쭉 안 보고 지내시다가 귀네스 아주머님이 코로나에 걸린 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어머님은 장례식에 초대받으셨고, 아버님은 귀네스 아주머니의 남편인 톰 아저씨로부터 장례식에 오지 말아 달라는 특별 부탁(?)을 받으셨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누군가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말실수를 하신 아버님은, 초대받지 못한 안타까움을 애도의 카드를 쓰는 것으로 대신하셨다.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을 품은 남편은 불행히도 아버님의 냉소적이고 톡 쏘는 어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래서 의도와 달리 사람들의 오해를 사는 일이 종종 있다. '왜 사람들이 진심을 몰라주지?'라고 질문하는 그에게, '그렇게 얘기하니까 당연히 모를 수밖에'라고 대답해 준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효율을 중요시하는 직장 문화가 남편에게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름을 재빨리 눈치채는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다르다. 남편의 동료 타냐에겐 그랬다.


20년 넘게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치고 있는 타냐는 완벽주의자이다. 경험이 풍부하고 고집이 세며 의심이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쉽게 수용하지 않는다. 컨트롤 이슈가 있는 그녀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패닉이 되며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디테일에 집착한다. 본인의 기분이 상하면 진흙탕 개싸움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그녀는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다. 어르고 달래어 한 번의 위기를 넘겨도 또다시 어떤 부분을 걸고넘어질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다. 남편에게는 너무 어려운 사람이었다. 힘들어하는 그를 도와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녀의 이메일들을 분석(?)하여 길잡이를 해 주었다. 최대한 그녀의 화를 잠재우고 일단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도록, (그녀의 관점에서) 말실수 없는 메일을 쓰도록 도왔다. '진짜, 이렇게 하는 게 낫다고?' 반신반의하며 타냐에게 메일을 보내고 몇 번의 위기를 잘 넘기며 지난 학기를 무사히 마무리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그녀와 비슷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도움이었다. 학과 내 (누구에게나) 골칫거리였던 타냐를 잘 해결한 남편은,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과 상담가의 기술을 가진 차세대 리더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게 되었다. 상담가의 기술이라... 직장 내 자신의 명성을 내게 전달하며 민망해진 남편이 멋쩍게 웃는다.


나는, 말실수를 하면 큰일이 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있는 듯 없는 듯, 아파도 찍소리 한 번 안 내고 싫어도 싫다는 소리를 안 하며. 그렇게 살아온 내게, '말실수'란, 해서는 안되고 한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잘못의 일종이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말실수를 해도 자식이 무조건 이해해야 하지만, 자식은 감히, 절대로, 부모에게 말실수를 해선 안된다는 세뇌 속에서 자랐다. 그런 내 기준(완전히 주관적인 기준)에 남편은 매일 습관처럼 부모에게 말실수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받고 이해받고 용서받았다.



아빠만큼 긴장 없이 말을 하는 아들은, 어릴 때부터 그 능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대부분 어린아이의 천진함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옆에 있던 내가 너무 당황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몇 해 전 런던 외곽에 있는 리치몬드 파크에 친구들과 피크닉을 갔을 때의 일이다. 공원 내 큰 카페가 있어 커피도 마시고 빵도 살 겸 들렀다. 햇살이 좋은 토요일 오후라 넓은 실내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손님 중 한 명이 검은색 부르카(눈만 좁게 내놓아 이슬람 복장 중 가장 폐쇄적임)를 두르고 한 팔에 명품 토트백을 건 채 우아하게 접시에 머핀을 담고 있었다. 진한 향수향을 풍기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아들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보더니,

"Is she a ninja?(이 사람 닌자야?)"

라고 물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고 동공에 지진이 온 채로 나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웃지도 않고 아주 점잖은 목소리로,

"No, she isn't.(그녀는 닌자가 아니야)"

라고 답했다. 하지만 아들은 또다시,

"She must be a ninja.(닌자임에 틀림없어)"

라며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아이 입을 막을 수도 없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니 함께 빵을 고르던 몇몇 사람들의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모두 암묵적으로 합의한 듯 누구 하나 소리 내어 웃지 않았다. 부르카를 입은 그녀 역시 웃지 않(는 것 같)았다.


한 번은, 보드넌트 가든에서 산책  간단한 스낵을 먹기 위해 매점에 들렀을 때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있던 내 뒤로 아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When is your baby coming out?(아기는 언제 나오나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고개를 돌리자, 배가 불룩 나온 중년의 신사가 껄껄 웃으시며,

"Hopefully soon.(곧 나오면 좋겠는데)"

하셨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못하고 여자만 아기를 품는다는 교육도 아직 안된 것 같은 아이에게 설명의 의지를 잃으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실 우린 아이에게 자주 말해주었었다. 엄마들이 임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아들, 도대체 왜 아저씨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건지... 그날의 사건은 아직도 우리의 기억 속에 풀지 못한 과제처럼 남아있다. 그저 미안하고 창피해서 숨어버리고 싶었다. 커피를 기다려야 해서 도망갈 수 없었다.


남편은 이미 중년을 넘은 나이라 지금부터 노력해도 바뀔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하지만, 아들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 너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내뱉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도록. 누군가 상처받는 건 아닐까 고려해 보고 배려하도록. 그 정도의 예민함은 갖도록. 아이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사회화를 돕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최대한 많이 설명해 주고 이해시켜 주고자 애쓴다. 설령 말실수 유전자(nature) 같은 게 있다 해도 양육(nurture)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하며.


이전 11화 주차 못하는 남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