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nah Sep 07. 2023

무섭지만 친절한 이웃

달 전, 드디어 새로운 이웃이 생겼다. 우리가 이사 들어오기  개월 전부터 거의 1년 가까이 비워져 있던 집이었다.


내가 사는 집은 semi-detached house라고 불리는 형태로 두 집이 벽을 사이에 두고 데칼코마니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벽을 공유하다 보니 혹시나 피해를 줄까 우려해 이웃이 생긴 순간부터 나는 평소보다 예민하게 남편과 아들을 단속했다.

영국의 semi-detached house 예시

그들이 이사 들어온 다음 날, 온 동네 헤비메탈 음악이 울려 퍼졌다. 한 낮, 한 시간 정도 가량. 사운드의 근원지는 옆집이었다. 우퍼스피커 때문에 온 집안이 진동했다. 우리 집에서도 이렇게 크게 들릴 정도인데 저렇게 듣다가 고막 나가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크게. 서재에서 일하던 남편이 주방으로 내려와 '옆집 가서 얘기하고 올게'라고 말하는 순간 음악이 멈췄다. 평소 엄청난 생활 소음을 생산하며 사는 남편에게도 한 시간 동안 이어지는 헤비메탈은 고역이었다.


그날 저녁, 옆집 아이(십 대 중반 추정)의 친구들처럼 보이는 십 대 남녀 무리가 양손 가득 봉지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옆집을 방문했다. 현관이 아닌 뒷문을 통해 가든을 지나 창고(shed)로 들어갔다. 넓지도 않은 창고 안에서 아이들은 아마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술을 마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밤 11시가 넘도록 어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옆집에 new home카드 보낼까?"

내가 물었다. 아무래도 일단 서로 인사를 나누고 얼굴을 알게 되면, 어떤 이야기를 꺼내든 지금보단 쉽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엄마한테, 가든에서 꽃도 좀 꺾어 달라고 해서 같이 주자."

그렇게 우린 카드를 쓰고 꽃과 함께 전해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볕이 좋아 정원에 빨래를 널기 위해 주방문을 열어젖혔다. 젖은 빨래를 한 아름 안고 나가 건조대 위에 올려놓는 순간 인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두 명의 여성이 옆집 정원에 나와있었다. 옆집이 이사 들어온 이후 어른을 본 건 처음이었다. 한 명은 흔들 그네 위에 앉아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담배를 피우며 가든 테이블 위에 있는 쓰레기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네에 있던 사람은 핑크색 머리에 입술과 코에 피어싱을 하고 뒷목부터 손목까지 진한 문신을 하고 있었다. 스모키에 가까운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눈썹이 없었다. 압도적인 모습에 눈 둘 곳을 찾다가 나머지 한 명을 쳐다보니, 그녀는 귀밑으로 카지노 칩만 한 피어싱을 양쪽으로 하고 있었다. 핫팬츠에 크롭티 차림이었던 그녀 역시 목에서 발목까지 이어지는 짙은 문신을 옷처럼 입고 있었다. 아프리카 부족에서나 볼 법한 크기의 피어싱을 실제로 처음 본 나는, 후들거리는 사지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최대한 정답게 'Hiya(친밀한 로컬 인사)'라고 인사했다. 반갑게 인사해 주는 그녀들의 웃는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그래, 그냥, 보기에만 무서운 거다, 그런 거다. 속으로 되뇌었다.


그녀들은 커플이다. 아이도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셋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들이 서로 babe라고 부르는 걸로 봐선 파트너임에 틀림없다. 아이에게 각자 잔소리를 하는 걸로 보아 엄마가 두 명인 가족관계의 확률이 높아 보인다. 엄마들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이에게만큼은 '등교할 때는 화장을 하지 마라', '아직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 '크리스(아이의 친구 이름인 것 같음)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담배를 피우면 몸에 해롭다' 등등 보통 엄마들이 하는 잔소리를 한다. 요즘 이곳 북웨일스는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주방 문을 열어 두고 지내다 보니 의도치 않게 옆집 대화를 많이 듣게 된다.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친구의 스트레스지수를 걱정하며 반신욕을 권하는 스위트한 이웃 사람. 간호사가 직업인 그녀는 교대 근무로 정작 자신은 너무 피곤하여 요리 대신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친구의 웰빙을 염려하는 다정한 사람이다.


봉석이 엄마(드라마 '무빙' 등장인물)만큼은 아니지만 예민한 내 청력 덕분에 이웃이 무섭지 않고 따뜻한 사람들이란 걸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들은 주말에 사람들을 초대해 바비큐파티를 열기도 하는데, 파티에 초대받아 오는 사람들 모두 겉모습이 화려(하다고 해야 할까 기괴하다고 해야 할까)하다. 그중에는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마비가 올 것 같은 하드코어의 모습을 한 사람도 있다. 겉모습이 놀라울 뿐, 눈이 마주치면 모두 따뜻하게 웃어주고 반갑게 인사해 준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해 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시어머니가 손수 따주신 정원의 꽃들과 정성껏 쓴 카드를 들고 옆집을 찾았다. 서로 정답게 인사를 나누고 잘 지내보자는 덕담을 주고받았다. 오후에 아이를 픽업해 돌아오니 옆집 창틀에 우리가 건넨 카드가 전시되어 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에게 느낀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해 주는 것 같아 기쁘고 설렌다.


좋은 이웃이 생긴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