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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Sep 13. 2023

제발, 미안하다고 말해줘 1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두 시간이 지나서야 물병을 들려 보내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벌써 두 번째 실수다. 평소 재택근무를 하는 남편은 하필이면 오늘 대면 미팅이 있어 차를 타고 출근했고, 일주일 내내 맑던 날씨는 갑자기 어젯밤부터 흐려져 아침 내내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아이 학교는, 높은 언덕 위에 있기 때문에 오는 길 보다 가는 길이 다섯 배는 힘들다. 그래도, 가야 한다. 목이 마를 아이를 생각하니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비옷을 입고 물병을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이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민달팽이


나는 (가끔 실수하지만 비교적) 예민하게 아이를 살피는 엄마다.


아이는 아빠를 닮아 감각적으로 예민하지도 사회적 민감도가 높지도 않기 때문에 아이의 니즈를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다. 그래서 아이는, '우와, 엄마, 어떻게 알았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말도 안 했는데 자기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 구는 엄마가 신기할 수밖에.


민감도가 스스로를 향해 있었던 친정엄마 밑에서 항상 눈치를 보고 자란 나는, 사람의 결핍과 욕구를 알아차리는 데 성장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줄까, 아니, 덜 불행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엄마가 떠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함께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서운함, 외로움 혹은 불안함과 같은 감정들은 모두 꿀꺽 삼켜가며 살았다. 부정적 정서에 민감한 엄마가 눈치챌까 무서워 그런 감정이 드는 즉시 억압하고 숨기고 부인해 버렸다.


엄마는 내 준비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뭐든 혼자 잘 해내는 아이였다.


하루는 소나기가 내려 비를 쫄딱 맞고 하교를 했는데 비 맞은 생쥐꼴이 된 나를 보더니 엄마는 '쯧쯧, 다음부턴 우산 가지고 다녀'라고 했다. 지금의 내 아이보다 어렸던 나에게, '에고 우리 딸, 비 맞고 왔구나, 엄마가 몰랐어, 미안해. 속상하고 추웠겠다'란 말을 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 후로도 나는 갑자기 비가 오는 날은 늘 비를 맞으며 하교했다. 기대가 없어지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력감과 체념이 가져오는 안정감. 더 이상 슬프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는 따뜻한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다. 예민하게 아이의 필요를 읽어내어 알아서 척척 처리해 주는 엄마, 늘 감정 상태를 물어봐주고 수용해 주는 엄마. 그런데 아이는 민감한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맞나 싶게 둔감했다. 나는 준비된 엄마였는데, 아이에겐 그런 예민함이 필요 없었다. 그저 기다려주는 엄마면 되었다. 성격 급한 내게 형벌과도 같은 기다림. 아,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고난과 인내의 연속인 걸까. 그런 이유로 모든 트러블의 뒤치다꺼리는 내가 다 하고도 '따뜻한 부모'의 영광은 늘 느긋한 남편이 차지했다. 남편을 보며 '아, 나도 저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마음 편하고 싶다' 생각하다가도, 나보다 일처리가 빠른 어느 누군가가 그런 나를 보며 한심하다고 생각할까 봐, 고개를 휘저으며 잠시나마 들었던 생각을 떨쳐낸다.


처음 아이의 물병을 깜빡했던 때는 아이가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막 들어간 시점이었다. 신도시 초등학교라 1학년 한 반에만 서른 명, 한 학년에 11반까지 있던 과밀학교였다. 경비실에 사정을 말씀드리고 맡겨 볼까 싶었지만, 어차피 등교 후 세 시간 반만 있으면 하교하니 물병을 들고 교문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너무 미안하고 속상해서 안절부절못하던 찰나, 아이가 '엄마'하고 손을 흔들며 나오는 게 보였다.

"에고 우리 아들, 엄마가 물병을 깜빡하고 안 줬어. 정말 미안해. 너무 목말랐지?"

내가 묻자,

"아, 괜찮아,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가지고 던 물 하나 주셨어."

라며 거의 다 마신 500ml 생수병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바로, 오늘 놀이터에서 누구누구를 만나 포켓몬 카드를 교환하기로 했다며 놀이터로 나를 이끄는 아이.


물병을 놓고 간 사실을 안 순간부터 아이를 만나기까지 두 시간가량 마음을 졸인 나 자신이 잠시 우스워졌다. 예민해서 결과적으로 무안하고 민망해진 상황은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아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는 게, 혹여 다쳤다면 잘 아무는 게 더 중요하다. 물론 속상하지도 않은 아이를 붙들고 '에이, 지금 기분 상했잖아, 슬프잖아, 엄마가 다 알아'와 같은 넘겨짚기는 하지 않는다. 아이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물러나 기다린다. 아이에게 잘못을 하면 진심으로 사과한다.


너무 큰 잘못을 하고도 절대 사과하지 않는 엄마를 보며 자랐다. 그게 너무 싫었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프로사과러' 엄마가 될 수는 없다. 그 사이 어딘가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내가 보여주는 기준들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테니까. 진심을 담은 적당한 사과의 기술이야말로 관계를 망치지 않는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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