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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Sep 13. 2023

제발, 미안하다고 말해줘 2

내가 사는 곳 주변의 인도들은 대부분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포장이 잘 되어 있지도 않고 폭도 매우 좁다. 유모차나 휠체어는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이 멈춰 주어야 겨우 지나갈 수 있다. 거기에다가 personal space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국의 문화가 더해져, 인도 위에서는 행인들 사이에 '네가 가라, 내가 갈까' 상황이 늘 연출되는데, 어쩌다 미처 못 보고 함께 좁은 인도에 들어서기라도 하면 상대와 부딪히느니 차라리 도로로 내려가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게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을 거리와 공간을 내줌으로써 예의를 지킨다. 양보해 주는 사람에겐 고마움을 표하고 혹시라도 먼저 지나가게 되거나 상대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미안하다는 말로 의도치 않은 실수였음을 밝힌다.


남편은 퍼스널 스페이스무디다. 아니, 필요한 개인적 공간이 아예 없는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집에서는 늘 몸 어느 한 곳을 내 몸과 맞대고 있거나, 길을 걸을 때도 항상 내 손을 잡는다. 로맨틱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시야가 좁은 남편은 자기가 걸어가는 앞만 보고, 옆에 가로등이나 쓰레기통 같은 것들은 못 보기 때문에 손을 잡은 채 장애물들을 피해 가야 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이다.


촉감이 예민해서 누군가와 붙어있는 게 불편한 나는, 한쪽 다리는 남편에게, 다른 쪽 다리는 남편을 꼭 닮은 아들에게 내어주고 우리 셋은 넓은 L자형 소파 중 오직 한 유닛에 한 몸처럼 붙어 앉아 티브이를 시청한다. 내가 불편하다고 말하면, '아, 미안'하고 일시적으로 둘 다 떨어졌다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또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이때 '미안하다'는 말은, 그저 '어머', '아이고 그랬구나' 정도의 의미이지 '알았으니 다음엔 안 그럴게'란 뜻은 전혀 아니다.


문제는, 길을 걷다 다른 사람들을 마주칠 때이다.


걸음이 빠르고 눈치가 없는 남편은 반대 방향에서 유모차나 전동휠체어가 오더라도 멈추지 않고 걸어간다. 그러면 그들이 멈춰 선다. 나는 매번 민망해서 거의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며 미안하다, (그들이 웃고 있다면, 양보해 줘서) 고맙다와 같은 인사를 한다. 십중팔구 다른 생각을 하며 걷는 남편은 인사할 타이밍마저 놓쳐 그냥 쌩 지나가 버리기 일쑤다. 한 번은, 반대편에서 우리를 기다려주던 사람에게 앞서가던 남편이 Hi라고 인사했는데, 당연히 thank you나 sorry를 기대했던 그 사람은 거의 동시에 that's alright이라고 해버렸다. 그 뒤를 따르던 내가 thank you를 하고, 그렇게 괜찮아요(천만에요) 듣고 나서 고맙습니다라고 얘기하는 덤 앤 더머식 짧은 대화가 오갔다.


몽골인과 같은 시야로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들의 동선을 짐작하여 남편을 제때 멈춰 세우지 않는 한, 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래서 편한 시절도 있었다. 한국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정겨운 터치나 개인적 공간을 침해하는 것 같은 행동들에 남편은 매우 관대했다. 복잡한 곳을 걸을 때, 사람들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지나가도 그는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남편이 사람들을 치고 다닌 것 같기도 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서로,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다. 나만, 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부분이 'personal space' 인걸로 아는데, 내 남편은 왜 그럴까. 시댁 식구들은 과할 정도로 타인에게 길을 양보하는데, 그럼 건 가족의 문화도 아니지 않나. 한국에서, 한국사람들보다 더 친밀하게 타인의 개인적 공간을 침범하고 다닌 남편은, 본인의 나라인 이곳에서 오히려 더 이방인 같다.


점심에 짬을 내어 남편과 바닷가를 산책했다. 산책로에 들어서기 전 남편에게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걸을 것을 당부했다. 양보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 줄 것과, 혹여 걸음이 빨라 누군가를 따라잡듯 스쳐 지나가면 미안하다는 말도 잊지 말라고 얘기했다. 너무 구체적인 요구라 자신이 모자란 사람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은 남편이 '그럼 강아지들은? 걔들한테도 똑같이 하면 돼?'라며 내 진지함을 무력화시키려 농담을 던져본다. '응, 일단 습관이 될 때까지는 그렇게라도 하자'라며 반농담으로 응수했지만, 장난 섞인 말이 오가는 와중에 내가 한 말들을 깡그리 잊었을까 또다시 불안이 엄습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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