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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Sep 26. 2023

첫사랑은 잊히지 않는다는 거짓말

바라만 봐도 가슴이 콩닥거리던 친구들이 있었다. 늘 부모 눈치를 보고 겁먹은 채 살고 있었지만, 사춘기가 되자 이성에 눈이 떠지고 마음이 널을 뛰었다. 그 아이를 좋아한 건지 그런 내 모습이 좋았던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흥분 상태에서 러브레터를 보내고 답장을 받고, 그렇게 상현이란 아이'마니토' 게임을 가장한 비밀우정이 지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학부모총회를 다녀온 엄마가 잔뜩 화가 나서는 나를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네가 먼저 상현이한테 편지를 보냈다며?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값 떨어지게 뭐 하는 짓이야? 앞으로 내 귀에 이런 소리 다시는 안 들리게 잘 처신해"

그때까지 나는, 좋아하는 아이에게 먼저 편지를 보낸 일이 그렇게 수치스럽고 누군가에게 죄송한 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 이후 누군가에 마음이 설레면 동시에 수치심과 죄책감이 몰려왔다.


학창 시절 단 한 번의 반항이나 모험 없이 착한 딸로만 살았던 내게 대학 생활은 그야말로 혼란과 격정의 연속이었다.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한 살 연하의 남자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나도 내가 누군지를 몰랐던 시절, 불안과 혼돈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겪으며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는 연애를 일 년 반 지속했다. 그가 좋았지만, 나 자신은 싫었다. 마음이 들뜨면 어김없이 수치심이 동반되어 첫사랑의 애틋함을 오롯이 느끼기 힘들었다. 상대에겐 설명할 수 없는 이 모순되고 복합적인 감정들 때문에 지쳐있던 나를, 결국 그는 감당하지 못했고 떠나버렸다. 다시는 비슷한 실패를 하지 않으리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과거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연애는, 결국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친밀한 관계 속의 내가 어떨지는 그런 관계를 경험함으로써 알아갈 수 있다.


예민한 나는, 연애라는 인생의 중대한 사업에서 크게 실패하자 '다시는 연애하지 않겠다'는 함정에 빠져버렸다. 그가 잊히지 않았다. 차라리 기억력이라도 나빴으면, 하고 바랐지만 몇 년이 지나도 우리가 나누었던 사소한 대화나 그의 손 모양, 눈썹과 같은 세세한 것들까지 기억 속에 머무르며 나를 괴롭혔다. 내가 나를 알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나 컸다.


군대를 제대한 그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내 기억은 우리가 헤어진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그와 마주한 순간 지체 없이 3년 전의 나로 되돌아갔다. 조금도 성숙하지 못한 채로, 여전히 슬픈 채로. 그에게도 나는 첫사랑이었으므로 그 설렘과 그리움을 찾아 돌아왔지만, 전혀 변하지 않은 내 모습이 당황스러운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일 다신 하지 말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서로를 단념했다.


내 불안의 근원을 좇아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마음을 주지 않고 썸을 타면, 상대를 알 수 없단 생각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나 자신을 속이는 기분까지 들었다. 마음을 다치고 긴 회복을 해야 하는 고난을 감수하고라도 연애를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늘 고민했다. 연애를 하지 않아도 이렇게 불안한데,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져야 나 자신을 파악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내 불안의 근원인 부모 앞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발현되지 않았던 방어기제가 새로운 관계 속에서 총출동하면 어떡하나,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6년 후 그는 다시 내 앞에 섰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 여리고 불안했다. 곧 유학을 앞두고 있다고 말하니, '그럼 내가 너를 보러 런던으로 갈게'라고 말하는 그. 그렇게 우린 잡지도 않은 약속을 뒤로하고 또다시 헤어졌다.




런던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기까지 십여 년간 첫사랑의 굴레에 씌어 자기 비하와 연민을 반복해서 오갔다. 남편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본인 입으로 연애를 많이 해봤다고 말하는 그에게,

"나 만나기 전에 한 50명 만났어?"

라고 농담을 던지자,

"음, 그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라며 그가 웃지 않고 대답했다. 순간 이유 모를 안도감이 몰려왔던 것 같다. 그렇게 많은 여자를 만나보고 나를 선택한 그, 라면 내가 나를 잘 몰라서 하는 실수들에 조금은 너그럽지 않을까, 노력하고 싶다고 얘기하면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지 않을까,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 오해와 갈등이 생기더라도 긍정적으로 잘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내게 훌륭한 삶의 가이드가 되어 주지 않을까.


연애를 많이  내가 견딜 수 없는 것들을 알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가진 상대와 연애하는 것도 좋지만, 싫어하는 걸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는 에너지 소모가 적으므로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아무리 좋아도 내가 견딜 수 없는 부분을 많이 가진 상대라면 갈등이 생기고, 잦아지고, 그러다 결국 헤어지기 마련이다. 남편이 견딜 수 없는 부분을 단 하나도 가지지 않은 나는, 남편 앞에서 솔직한 모습 '그대로의 나'로 설 수 있다. 불안과 걱정 없이, 내 본연의 모습을 다 보여주더라도 거부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남편을 만나고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왜 내가 첫사랑에 실패했고, 계속되는 인연에도 결코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없었는지. 감정 지옥에서 헤매던 대학시절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첫사랑의 애틋함마저 고통의 일부로 느껴져 몸서리가 쳐진다. 첫사랑이 소중한 사람은, 사랑을 했던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이 예쁘고 소중한 게 아닐는지. 각자 품고 있는 첫사랑의 모습은 다 다르겠지만, 예민하고 우울했던 에게 첫사랑은 그저 아프고 슬픈 기억으로만 남았었다. 되도록 빨리 잊고 싶었던.


남편을 통해, 두려움 없이 수치심과 죄책감 없는 사랑을 배워나갔다. 올라오는 감정들을 모두 풀어헤쳐 놓아도 그는 나를 견뎌주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을 비로소 용서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마침내 안정을 찾고 과거를 돌아보았다. 기억은 그대로이지만, 그 기억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은 전부 사라졌고, 그렇게, 씻겨 내려간 감정들과 함께 첫사랑도 깨끗이 잊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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