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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Sep 18. 2023

예민한 미각을 가진 아내와 다 먹는 남편

남편은 많이 먹는다. 부부와 아들 둘을 포함해 네 식구인 동생네가 일주일 치 먹을 식량이 우리 집에서 이삼일이면 동 날 정도이다. 대가족이 모여 외식을 할 땐, 모두가 입을 모아 '첫째 사위가 있으니 뷔페 가자'라고 한다. 그 말인 즉, 소식좌들인 동생네가 야기하는 손해를 모두 커버할 정도로 본전을 뽑고 올 수 있는 그가 있으니 뷔페를 가도 된다, 이다. 남편이 진지하게 사회 문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해도 친정엄마는, '자네는 아는 게 많아 먹고 싶은 것도 많은가 보다'하신다. 남편의 이름, 그 고유명사는 곧 '잘 먹는', '배가 안 부른', '불러도 먹는'등의 형용사적 의미로 사용되고 해석된다.


그렇게 잘 먹고 감사히 먹는 남편 덕에 난 결혼 10년 만에 요리사가 됐다. 누가 어디서 맛있게 해 먹었다는 요리법을 들으면 빠른 시일 내에  먹어본다. 일본식 오야꼬동을 먹으면 담가둔 궁채절임이나 후쿠진즈케를 곁들이고, 대만식 샤오롱바오를 먹을 땐 향긋한 생강을 채 썰어 간장종지에 담아내고 마라황과(대만에선 라웨이황과)를 함께 내놓는다. 태국식 돼지고기 덮밥엔 싱싱한 바질을 듬뿍 넣고, 딱딱한 파파야를 채 썰어 매운 베트남고추와 피시소스, 땅콩과 새우, 라임을 으깨어 버무려 낸 쏨땀을 낸다. 영국식 선데이로스트(오래 익힌 고기 위에 로스트감자, 다른 여러 익힘 채소들과  그래이비로 맛을 내는, 전통적으로 일요일? 에 먹는 영국 요리)를 먹을 땐 요크셔푸딩이라는 간단하고도 먹음직한 빵을 구워 곁들인다. 독일식 족발인 슈바인 학센을 요리할 때는 2-3주 전 미리 만들어 푹 발효시킨 사우어크라우트를 함께 내어 놓는다. 음식들은 그릇에 담기기가 무섭게 남편의 뱃속으로 사라진다.


물론 이렇게 다양한 요리를 시도해 보려고 마음먹은 데는 뭐든 잘 먹어주는 남편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컸지만, 내 예민한 미각 덕분에 요리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이유도 있다. 남산 돈가스를 운영하는 봉석이 엄마(요즘 푹 빠져 있는 드라마라 계속 언급) 만큼은 아니지만, 외부 음식을 먹으면 대충 어떤 재료와 양념들이 들어갔는지 알아내는 게 어렵지 않고 얼추 비슷하게 맛을 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집에서 비슷한 음식을 만들어 보는 시도를 하고 그 모든 과정에 들어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계속해서 발전한다.


미각과 후각이 예민한 것은 요리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민한 모든 사람이 요리를 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보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예민하지만 요리는 못하는 시누를 보면 알 수 있다.


지난봄 시누의 초대를 받아 2박 3일로 그녀 집에 다녀왔다.


역시 먼지 한 톨 없고, 모든 물건은 자리에, 가구들은 줄을 맞추어 나란히, 침구에선 향긋한 섬유 냄새가 나고 손님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욕실 용품이나 작은 소품들에까지 닿아 있다. (남편의 수습조인) 나와 세트로 움직이지 않는 한 누나집에 초대를 못 받는 남편은 그저 그곳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요리에 자신이 없던 시누는 자신의 남편인 스티브의 도움을 받아 매콤한 중식 덮밥을 첫 저녁 식사로 내놓았다. 테스코에서 파는 간편 소스(염분이 높아 맛있게 느껴짐)를 이용했음에도, 싱싱한 해산물과 야채를 잔뜩 넣었음에도 맛이 없었다. 맛을 잘 내지는 못하지만 맛을 잘 보는 시누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계속해서 양념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해산물은 질겨지고 야채는 흐물거려 식감이 사라져 버렸다. 추가로 첨가된 양념은 간편 소스와 어우러지지 못해 이도저도 아닌 맛을 내고 있었다. 울상이 된 시누와 스티브는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하며 뭐가 잘못됐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도마 위에 당근을 써는 정도를 요리라고 생각하는 남편이 '너무 오래 끓여서 그런 거 아닐까?'라며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해서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그래도 괜찮아, 하며 그가 순식간에 두 그릇을 해치운 덕분에 분위기는 다시 좋아졌다. 역시, 복스럽게 먹는 남편, 천둥벌거숭이지만 사랑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디저트를 먹으며 시누가 내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뭐가 잘못된 걸까? 정말 알고 싶어."

그녀의 마음을 살피며 대답한다.

"충분히 맛있었는데, 아마도 야채를 많이 넣어서 물이 생기는 바람에 소스가 제 역할을 못했던 게 아닐까 싶어. 다른 양념을 추가하기보다, 같은 소스를 1.5배 넣는 것도 괜찮고 야채 양을 줄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단단한 야채를 먼저 넣고 연한 것들과 해산물을 나중에 넣어 식감을 맞춰보면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맨 처음, 기름에 파와 다진 마늘을 넣어 볶으면 맛이 깊어져."




예민한 미각과 부지런한 성격을 가진 아내 덕분에 오늘도 내 남편은 고릴라 같은 소리를 내며 저녁을 먹으러 주방으로 들어온다. 무엇을 얼마나 내놓든 모든 접시가 깨끗이 비워지는 마법을 보고 있노라, 내 음식들이 맛있어서 다 먹는 건지, 아님 그냥 어차피 다 먹을 거였는지 헷갈린다. 그래도 내 행복을 위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민함은 요리할 때 다 쏟아붓고, 지금은, 행복해하는 남편과 함께 그저 눈앞에 놓인 음식을 즐길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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