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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Dec 26. 2023

내 비율이 어때서

작은 얼굴이 미인의 조건인 한국에서 나는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화장이 필요 없던 어린 시절, 가장 날씬했던 시절, 모든 시절을 망라하여 예쁘다는 말 대신 잘생겼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늘 예쁘다는 말을 듣고 사는 동생이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예뻐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도 있었다. 첫사랑에 실패했을 땐, '내가 좀 더 예뻤다면 그 애가 날 떠나지 않았을까?'라는 자문도 해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건강한 흑발에 피부도 나쁘지 않은데 예쁘단 소리 한 번 들은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해답의 실마리는 고맙게도(?) 남편이 찾아주었다.


결혼 전 시댁에서 보낸 두 번째 크리스마스. 줄리(시누)와 나는 어쩌다 나란히 서서 함께 브뤼셀스프라우트(꼬마양배추)를 다듬게 되었다. 뒤에서 지켜보시던 어머님이, '너희 키가 완전히 똑같은데?' 하셨다. '에이, 설마요'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서 있을 때는 170에 가까워 보이는 줄리. 놀라기는 줄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160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그녀가, 등을 마주대고 서서 키를 재보자고 제안했다. 머리 위에 책을 놓고 봐도 키가 똑같다! 몸무게가 같은 우리는 키도 같다며 신기해했다. 나는 그저 대화를 이어갈 목적으로,

"줄리가 나보다 훨씬 커 보였는데"

라고 얘기했는데, 남편이,

"아, 자기(babe) 얼굴이 커서 비율 때문에 키가 작아 보이는 거야."

라며 마치 내가 모르는 답을 본인이 찾아 준 것 마냥 뿌듯해했다.


나는 정말 몰랐던 걸까? 알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걸까?


영국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내 외모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의 개성이 존중되고 모난 돌이어도 정을 맞지 않는 이곳에서, 내가 가진 장점과 단점들을 가치 판단 없이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비단 외모만이 아니었다. 자기주장을 강하게 어필해도 비난받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개인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자유를 부여해 주었다. 백 명이 모이면, 백개의 다른 얼굴과 이견들이 존재했다.


그때부터 내 외모를 실용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은 뒤 헤어드라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바람에 말려도 부스스하지 않은 흑발을 가진 나는, 그래서 시간을 아껴 책을 한 장 더 보거나 영어 단어를 몇 개 더 외울 수 있었다. 니베아 크림을 발라도 트러블이 없는 피부는, 어디로 여행을 가든 어떤 나라의 물로 세수를 하든 별 탈이 없이 잘 견뎌주었다. 가지런한 눈썹은, 매일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그럭저럭 봐줄 만해서 화장을 못하는 내겐 참 편했다. 원래 쇼핑을 싫어하고 옷을 잘 입는 센스가 부족한 나는, 아무거나 입고 다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런던이 참 좋았다.


처음 대학원 수업을 들어간 날, 강의실에 20분 정도 일찍 도착해 빈 노트에 회를 끄적이고 있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두 사람이 들어왔는데, 둘 다 사오십 대 정도로 보였다(영국 대학원, 특히 조직심리학과는 필드에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공부를 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서른 초반인 내가 코스에서 제일 어린 학생이었다). 한 명은 내 뒤로, 다른 한 명은 강의실 맨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앞에 앉은 학생은 사과를 꺼내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A4용지 여러 장을 훑어보는 듯했다. 9월이었는데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등산화처럼 보이는 투박한 신발을 신은 채로 다리를 떨다가 보온병에 담아 온 차까지 한 잔 들이켜더니 그녀는 일어서서 책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교실이 꽉 채워지자 그 학생이 교단 쪽으로 걸어가... 신다... 교수님이셨네?... 남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쿨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첫인사를 건네던 그분. 그곳은, 그들은, 그렇게 내게,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타인이 나를 판단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자, 눈빛과 태도에서 자신감이 자랐다.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엔 기대와 희망이 생겨났다. 사람에 대한 기대, 관계에 대한 희망. 내가 꾸미지 않은 본연의 모습이어도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거란 기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편이 내게로 왔다.


나는 내가 6등신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8등신은 모델의 비율을 가진 자들이고, 7등신이면 비율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도 6등신이다. 키가 183인데 6등신이니, 165인데 6등신인 나보다 절대적으로 헤드 사이즈가 크다. 비율 때문일까,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남편과 까만 눈에 흑발을 가진 나는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때, 우리 둘 다, 그다지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닌데?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듣는다. 비율이 좋은 내 동생은,

"언니, 형부 얼굴이 너무 커서 옆에 있으면 언니가 작아 보여."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도, 외국인들은 얼굴이 작고 앞뒤짱구가 많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살았다. 막상 영국에 와 살아보니,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고 비율이 문제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비율이 문제든 비만이 문제든, 그건 남의 일이다. 내가 나를 재단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원래 자존감이 높아 남들의 의견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경우엔 남들이 하도 신경을 안 써주니 더 이상 자기 비난을 할 이유가 없어진 케이스이다.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며 나를 사랑하는 법을 새로 배운다.


재작년 어느 날, 한국에서 수영장을 다니며 알게 된 어떤 사람이 바로 내 옆에서 샤워를 하다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으미(전라도 사람), 키가 엄청 컸었네이. 멀리서 봤을 땐 나만한 줄 알았구먼."

키가 내 코 정도까지밖에 안 오지만 얼굴이 작아 비율이 좋은 그 사람에게,

"아, 얼굴이 커서 그렇게 느끼셨나 보네요. 저 작지 않아요. 하하하."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내가 대신해 줘서였을까, 그녀 역시 호탕하게 웃었다. 얼굴이 크다는 건, 내가 가진 하나의 신체적 특징일 뿐이다. 하지만 과거엔, 이미 남들 눈에도 보이는 그 특징을 내 입으로 말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남들이 들춰낼까 왜 그렇게 노심초사했는지. 혹여 누가 언급이라도 하면 왜 그렇게 부끄럽고 화가 났었는지.


얼굴이 큰 게 내 생활에 어려움을 가져오지 않으므로 단점으로 파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보다 얼굴이 훨씬 더 크지만 자존감이 높은 남편과 살아서인가. 나에 대한 그의 무한한 애정이, 내가 비율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식지 않을 거라는 단단한 믿음이 있어서인가.


비율은 비율일 뿐, 나를 정의하는 그 어떤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에 집중한다. 그리고 비로소, 바라던 나의 모습으로 내가 정의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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