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nah Dec 19. 2023

코 고는 여자

남편을 어떻게 용서해야 할까, 고민이다. 억울하고 분해 이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데, 얼굴만 봐도 웃겨서 굳은 표정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집에서 최대한 그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나는 평소 핸드폰 알람 기능을 모두 꺼두고 생활한다. 그래서 내가 직접 사이트에 들어가 보거나 메일에 접속하기 전에는 어떤 소식이든 알 길이 없다. 어제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남편이 나를 태그 해 놓은 포스팅을 봤다. 


성인 ADHD가 의심되는 남편은 논문을 쓰다가도 팝업 광고 하나에 주의를 상실하여 한 시간씩 웹의 바다를 헤맨다. 꼼꼼하게 관찰하거나 주의 깊게 판단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가 올리는 포스팅은 대체로 깔끔하지 않고 두서와 맥락이 없다. 다행히 학문적인 용도로는 트위터(현재는 X)만 사용하고 있고, 그곳에서는 의식의 흐름에 따른 포스팅은 하지 않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학자로서의 권위는 유지하고 있다.


보통은 주말에 어딜 갈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북웨일스의 관광 명소들에 나를 태그 하는 그였기에, 어제도 별생각 없이 알림에 클릭을 했다. 그리고 재생된 비디오, 어떤 부연 설명도 없이 내 이름만 덩그러니 태그 되어 있던 그 당황스러운 비디오. 영상 속 한 남자는 흥분한 목소리로, '코를 심하게 고는 분들, 수면 무호흡증도 이제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공개 여부를 보니, 모든 친구에게 오픈되어 있는 포스트였다. 가만있어 보자, 남편의 페친은 800 명이 넘는데... 공개된 지 세 시간도 넘었다... ... 아니야...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일단 나는, 배운 여자이기 때문에, 우아함을 잃지 않는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서재에서 온라인 미팅 중인 그의 멱살을 잡는 대신, 정확한 사실을 적시하여 오해를 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댓글을 달았다.

"여보, 아무런 설명 없이 나를 이렇게 태그 해 놓으면, 내가 수면 무호흡으로 정부 보조금까지 받을 정도라고 사람들이 오해할 것 같은데? 진실을 밝혀줄래요?(웃음 이모티콘)"

최대한 쿨하게, 사실이 아니므로 전혀 타격이 없다는 듯이.


그는, 페이스북에 달린 내 댓글에 해명을 하지 않고 내게 직접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포스팅을 지워버렸다. 아... 예상하지 못한 전개인데? 이제 나는, 포스팅이 공개되었던 세 시간 동안 남편의 페친, 누구일지 가늠도 안 되는 불특정 다수에게, '코를 너무 골아 정부 보조금을 받을 지경이 된 아내'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포스팅은 자취를 감추었고, 나는 영원히 그 이미지로 박제될 것이다.


저녁을 먹으며 따져 물으니, 남편이,

"아니, 수면 무호흡은 심각하게 간주되는 질병이야.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라며, 나를 질병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논지를 흐리려고 한다. 말려들지 않고, 내가,

"응, 당연히 아니지. 근데, 나는, 수면 무호흡증이 없잖아. 코를 고는 건 당신인데 왜 나를 태그 해 놨을까?"

라고 했더니 그제야 그가 들켰다는 듯 박장대소한다. 실제 코를 골고, 수면 무호흡이 의심돼 최근 이런저런 논문과 기사를 찾아보다가 정부 보조금 관련 영상을 발견한 남편. 잊어버릴까 급한 마음에 나를 태그 했는데, 실수로 공개 여부를 친구 전체로 설정해서 이 사달이 났단다. 아내가 오해를 받는 건 괜찮고, 본인의 질병(?)이 알려지는 건 원치 않아 내가 코멘트를 달자마자 포스팅을 삭제해 버린 웬수.


그렇게 찝찝한 상태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이 답답한 심경을 토로할 곳이 없다. 너무 분한데 솔직히 웃기기도 해서 어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복수, 보복, 반격'이런 것들인데,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계산이 안 선다. 남편에게는 아주 조금의 타격만 도, 나는 계획적으로 의도해 반격을 한 것이지만 자신은 나쁜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미지 피해를 크게 입은 나보다 자신이 더 피해자라고 주장할 게 뻔하다. 결과적으로 내가 처참히 패한 기분인데, 의도적인 복수는 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남편의 실수를 항상 용서해 주며 살았다. 나쁜 의도가 전혀 없는 순수한 실수들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번 사건 역시, 내 이미지가 공개적으로 어떻게 되든 결국엔 그를 용서해 주고 넘어가야 되겠지. 한숨과 헛웃음이 섞여 나온다. 남편을 사랑하는 대가로 뒤집어쓰고 사는 모든 오명을 해명할 날이 언젠가는 오길, 간절히 바라본다.



이전 05화 영화 취향이 비슷한 남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