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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Dec 18. 2023

영화 취향이 비슷한 남자

1999년, 재수를 하고 수능을 본 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달여간 비디오가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동네에 하나뿐인 작은 비디오테이프대여점이었다.


난, 초등학교 때부터 '주말의 명화'를 방영하는 주말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 안 본 홍콩영화가 없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학업을 병행(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하면서 일주일에 적어도 네다섯 편의 영화를 보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책과 영화는 내 삶의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생산되는 영화의 양이 내가 영화를 보는 속도를 못 따라간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대학 때는, 도서관 시청각실에 구비돼 있던 흑백영화들을 모조리 찾아보며 공강시간을 때웠고 흥미로운 새 영화가 없다고 느껴질 땐 문학과 영화를 비교해 가며 읽고 보기를 반복했다.


영화를 그토록 좋아하는 내가 비디오대여점에서 알바를 한다니, 처음엔 꿈만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영화를 보는 것이지, 대여대장을 관리하고 반납 독촉 전화를 돌리는 게 아니란 걸 그땐 알지 못했다. 저녁 6시까지 일을 하고 사장님과 교대를 하면, 그분은 자정까지 가게에서 술과 담배를 하다가 문을 닫고 몸만 쏙 빠져나갔는데, 다음 날 출근해서 소주병, 먹다 남은 찌개 냄비 등과 담배꽁초들을 치우고 환기를 시키는 건 늘 내 몫이었다. 알바를 시작하고 한 달 정도 됐을 때 그만두고 싶었지만, 돈이 필요했고 그 가게만큼 편하게 출퇴근할 수 있는 일은 찾기 힘들 것 같아 꾹 참고  달을 채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2월 말부터 어떤 회사원이 매일 찾아왔다. 그는 브라운 계열의 양복을 입고, 항상 내가 퇴근하기 전 늦은 오후다녀갔다. 나를 지긋이 쳐다보다가 영화를 추천해 달라며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하던 사람. 취향을 모르니 처음엔 인기 있는 작품, 호불호가 없을 듯한 작품들로 골라 추천했다. 그가 거의 매일 드나들다시피 해서 나중엔 결국, 에라 모르겠다, 장르를 불문하고 어떤 날은 '이레이저헤드'나 '블루벨벳'같은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주기도 하고, '쉘부르의 우산(지금은 라라랜드에 영감을 준 작품으로 더 알려진)' 같은 오래된 프랑스의 뮤지컬 영화도 추천했다가, 당시 좋아했던 감독 라스폰트리에의 영화들이나 짐 자무쉬의 몇몇 작품들, 마틴스콜세지의 '택시드라이버' '비열한 거리', 또는 알 파치노, 메릴 스트립의 주옥같은 작품들, 내가 사랑하는 '아비정전'이나 '라스트모히칸' 같은 영화도 추천했다. 그는 대부분의 영화를 몰랐고, 반납할 땐 늘 '잘 봤어요'란 한마디로 모든 피드백을 대신했다. 세 달간의 아르바이트가 끝나던 날, 그는 가게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어지던 고백.

"사실은 고등학생입니다. 이제 졸업하고 대학입학해요(명문대에 진학한 이 학생은 그동안 공부만 하느라 수능이 끝나고서야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추천해 주신 영화들 전부 제 취향이었어요. 우린 비슷한 점이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저랑 만나보실 생각 있으세요?"

나처럼 노안인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동안 고등학생인 그에게 추천한 수많은 영화들 중 혹시 부적절한 것들은 없었는지 복기하기 시작했다. 아... 있다 있어... 하지만 늦었다...


취향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그로부터 이성적 매력을 느끼진 못했다. 노력해 봤는데 안 됐다. 그는 그 후로 텀을 두고  오랫동안 여러 번 내 곁을 맴돌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노력해 보았지만, 결국 불가능했다. 우린, 과거를 함께 추억할 동무는 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으론 발전할 수 없었다. 내가 나를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관계를 시작하지 않을 용기가 있었이십 대의 나. 취향이 비슷하다는 사실은 이미 좋은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시작하지 못한 관계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남편과 데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옆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다가 그가 Mad World를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도 좋아하는 음악인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영화에 나오는 노래인데?' 했다. 영화배우 제이크 질렌할이 스무 살 정도 되는 나이에 찍은 '도니다코'라는 영화.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음악에 빠져 무한청취하던 시절이 있었기에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었다. 남편도 좋아했던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린 서로를 조금 더 깊이 알아갔다고 생각한다. 이미 좋아서 데이트를 시작했으니(모든 게 다 변명이겠지만), 싫다고 했어도 다른 취향을 갖고 있단 사실에 더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나이도 국적도 살아온 배경도 너무나 다른 그였지만, 우린 신기하리만치 많은 레퍼런스를 공유했다. '고무인간의 최후' 같은 B급 영화를 보며 깔깔거리고, 브래드피트가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던 영화가 '세븐'이나 '파이트클럽' 같은 영화가 아니라 '스내치(snatch)'라고 생각하며, '프린세스브라이드(1987)'에 대한 향수가 있고, 장자크 아노의 '불을 찾아서' 같은 영화를 재밌어하면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바스켓볼 다이어리'를 사랑하는 우리. 지구의 반대편에 살던 다른 언어를 가진 어떤 이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똑같이 보고 느끼며 비슷한 취향을 갖게 되다니.


그렇게 취향이 비슷한 남자와 살다 보니, 둘 사이에 서운한 감정이나 해결되지 못한 앙금 같은 게 남아도(대체로 내쪽에서) 같이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해소할 수 있었다. 훌륭한 영화를 보고 내가 감동을 받아 입을 벌린 채 엔딩크레딧을 보고 있으면, 그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나를 쳐다본다. 아, 이런 교류와 공유, 너무 좋다.


얼마 전 남편과 'Incendies'란 영화를 함께 보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을 했다. 손색없는 촘촘한 이야기 구조에 흠잡을 데 없는 연기와 연출, 단연 명작이라 할만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마음에 생채기가 나는 느낌이다. 훌륭하지만 두 번은 못 볼 것 같은 이 영화를,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과 함께 보고, 휘몰아치는 이 감정들을 그와 온전히 공유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영화 취향이 비슷한 남자와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감정적 풍요이자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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