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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Dec 12. 2023

아이의 고모부, 스티브

아이에겐 고모부가 한 명 있다.


고모부 스티브는 올해 쉰두 살의 중년이지만, 아이와 놀아줄 때 보면 초등학생의 영혼이  큰 몸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철없이 순수한 모습이다. 시누네는 서른 초반에 이미 딩크족을 선언했는데, 친인척을 포함해 많은 주변인들이, 그들이 그런 결정을 한 건 시누의 심각한 OCD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스티브가 아무리 '내가 아직 애라서 줄리(시누이름)에게 다른 아이는 필요 없어'라고 말을 해도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그저 아내를 위한 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볼수록, 스티브의 말이 진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스티브의 아버지는 스티브가 열 살 때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갔다. 양육의 의무를 저버린 채 두 명의 아들이 모두 장성할 때까지 연락한 번 없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컸지만, 스티브는 늘 쾌활하고 씩씩한 어린이였다.


줄리와 스티브는 초등학교 동창인데,  열두 살에 스티브의 고백으로 둘이 사귀기 시작했다. 밝고 명랑한 스티브가 좋았던 시부모님과는 반대로 누나 껌딱지였던 일곱 살의 내 남편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남편의 바람과는 달리 누나와 스티브의 연애는 삼 년간 이어졌고, 열 살의 남편은 여전히 누나를 지키겠다고 커플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스티브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남편은 항상 자신을 흘겨보는 가자미눈을 하고 있거나 심통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커플의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열다섯이 되던 해 그 둘은 헤어졌고 줄리는 다른 남자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스무 살에는 한 남자를 따라 캐나다까지 가서 반년 정도 살다가 돌아온 적도 있었다. 스티브만 한 매형감이 없구나, 남편이 슬슬 깨달을 때쯤, 줄리와 스티브는 기적적으로 조우해 스물두 살이 되던 해부터 다시 교제를 이어갔다. 십 년을 함께 살다가 결혼했고, 올해로 결혼 20주년을 맞았다.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노후 준비를 시작한 스티브에게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연락을 해왔다. 양육의 책임으로부터 평생 자유로웠던 스티브의 아버지는 아픈 몸으로, 같이 사는 파트너를 앞세워 스티브에게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줄리에 따르면, 평생 미워했지만 그리워도 했던 아버지가 연락을 해오자 스티브가 그를 너무 보고 싶어 했기에 차마 만남을 반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찰나의 고민도 주저도 없이 스티브는 차로 예닐곱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 아버지를 만나러 Cornwall로 갔다.


그는 사과하지 않았다. 어린 스티브를 때린 것에 대해서도, 가족을 철저히 버린 것에 대해서도.


물건을 쓰고 제자리에 두지 않으면 손찌검을 하던 아버지. 그런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깨끗하게 정돈된 아버지의 집안으로 들어서며, 스티브는 과거를 다 잊겠노라 다짐했다고 한다. 그건, 그 자신이 충분히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로부터 구체적인 사과의 말이 없었어도, 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후회로 점철된 관계를 굳이 돌아보고 다시 한번 이어가 보려는  한 번의 노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스티브는 그렇게 두 달에 한 번씩 그를 만나러 콘월로 향했다. 늘 줄리가 함께였기에, 과거를 뒤돌아 보지 않을 수 있었고, 영국 남서부의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에서 오롯이 시절을 즐길 수 있었다. 스티브는, 작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꾸준히 그를 방문하고 경제적인 도움도 드리며 아들 노릇을 했다. 아버지 노릇을 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스티브의 부양을 지켜보는 어느 누구도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모든 슬픔과 분노를 삼키고 좋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하고자 마음먹은 스티브의 결정을 존중해서였다. 줄리 역시, 그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그녀에게 어떠한 결정권도 없다는 것을, 그저 스티브를 지지해 주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집에는 아버지의 파트너가 살고 있다. 아버지를 만나러 다니면서 콘월과 사랑에 빠져버린 줄리와 스티브는 아버지가 없어도 일 년에 두 번씩 그곳을 찾는다. 그리고 남겨진 아버지의 파트너와 함께 아버지를 추억한다. 냉랭한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된 칭찬한 번 못 받아본 스티브는, 아버지의 파트너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표현이 서툰 사람이었어. 나는 그 마음을 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지. 사과할 일이 생기면 차라리 회피해 버리는 미성숙한 인간이기도 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스티브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야. 그는 누구보다 스티브를 그리워했고 곁에 있고 싶어 했어. 스티브가 우리를 만나고 돌아가면 그는 한동안 우울해했었어. 너무 큰 잘못을 하고도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음이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그가 스티브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몰라. 자신이 기여한 부분이 전혀 없는데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얻었다면서 항상 고맙고 죄스러워했지. 스티브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아들인지 꼭 얘기해 주고 싶었어."


줄리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어머니와 나는 눈물을 흘렸다. 스티브가 얼마나 큰 상처를 간직한 채 어른이 됐을지 짐작조차 안된다. 어머니의 기억 속, 열두 살 스티브는 그저 명랑하고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타인의 가정사에 큰 관심이 없는 이곳 문화의 특성상 스티브라는 아이와 그의 가정환경은 철저히 별개로 간주되었다. 성숙해서 숨겼건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었건, 내색하지 않았던 스티브의 아픔은 그가 고백을 할 때까지 많은 사람이 눈치채지 못했다. 씩씩한 듯 보였던 스티브에게도 아버지의 파트너가 해  이야기는 마음 깊이 와닿았다. 미움에 에너지를 쏟지 않으려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이제비로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한 스티브.


스티브는 어른이 되었지만, 처가(나의 시댁)에선 아직 열두 살의 어린아이처럼 장난꾸러기다. 시부모님께서는, 우리 넷(줄리, 스티브, 남편, 나) 'children'이라고 묶어 부르신다. 스티브에게도, 중년인 남편이 여전히 자신의 데이트를 방해하던 여자친구의 꼬마남동생으로 보이나 보다. 아홉 살의 아들, 마흔일곱의 남편, 쉰두 살의 고모부 이렇게 셋이 모이면 아무런 이질감 없이 초등학생 수준의 대화가 가능하다. 집안 곳곳에 부비트랩을 설치해 놓고 레이저건 싸움을 하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락없이 어린아이와 노는 모자란 동네형들 같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아이에게 실물처럼 움직이는 바퀴벌레 인형을 사 줄 테니 엄마(나)를 놀리자고 작당하는 천둥벌거숭이들.


사람은 각자의 사정을 품고 어른이 된다. 어떤 어른이 될지,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겨낼지는 나의 선택과 결정이다. 아이의 고모부를 보며 생각한다. 과거에 얽매여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누군가를 미워하는데 열정을 버리는 대신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충분히 사랑하기. 그렇게 충실히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나를 과거로부터 구하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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