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결혼에 관한 고찰(1)
어떤 경험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가 보인다. 나에게 결혼은 그런 경험이었다. 시작은 사랑이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로 이어진 순간부터 관계는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내가 이혼한 이유를 가만히 곱씹어봤다. 상대의 문제일까, 내 성격 때문일까, 혹은 우리가 너무 서두른 걸까. 하지만 그 질문들은 늘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특정한 방식의 삶을 강요한다는 사실 말이다.
결혼을 하면서 ‘나’라는 개인보다 ‘아내’라는 틀 속에서 살아가길 요구받았다. 상대가 바뀐다 해도, 결혼이라는 제도의 무게와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왜 결혼을 했을까, 그리고 왜 끝내야 했을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내 삶의 방식 자체와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결혼 체질이 아니구나.’
이 깨달음은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마치 매운 음식 못 먹는 사람처럼, 타고난 기질 문제라고 해두면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좀 더 복잡하다. 단순히 ‘결혼이 싫다’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고 싶은 방식과 결혼 제도가 어긋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결혼 생활에서 가장 버거웠던 건 ‘며느리’라는 위치가 요구하는 수많은 무형의 기대였다. 단순히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으로 들어가면 자동으로 부여되는 역할이 존재했다.
흔히 말하는 전통적인 고부갈등은 없었다. 시부모님은 집안일을 도우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하지도, 안부 연락을 노골적으로 강요하지도 않았다. 겉모습만 놓고 보면 아주 ‘자유로운’ 관계 같았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기대가 있었다. 직접적인 강요는 없었지만, 며느리라면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역할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다.
언제나 예의 바르고 싹싹해야 하며, 시가와의 관계를 세심하게 배려하고, 남편과 시부모님 간의 갈등이 생기면 중재자로 나서야 한다는 요구 말이다.
심지어 집안일을 얼마나 잘 돕는지, 어른들 말씀을 얼마나 귀담아듣는지도 은근히 평가되곤 했다. 사위에게는 결코 해당되지 않는 역할 기대가 며느리에게는 자연스럽게 주어졌다.
이 모든 기대는 겉으로는 ‘좋은 며느리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처럼 포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한 사람의 개성을 지우고, 특정한 틀에 끼워 맞추려는 힘이 작동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며느리라는 역할을 수행하며 점점 내가 누구인지, 어디까지가 내 의지인지 헷갈리곤 했다.
돌이켜보면, 이런 역할들이 유독 힘들었던 건 내가 장녀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K 장녀로서 늘 ‘잘해야 한다,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압박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시가의 기대를 거절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버거워도 당연히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해진 틀 안에 나를 억지로 맞추는 과정에서 나는 점점 스스로를 잃어갔다. 가족의 화목을 지키기 위해 웃었지만, 그 웃음은 내 감정을 숨기기 위한 가면에 가까웠다.
남편과 시가의 갈등을 중재하려 했지만, 정작 나는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 내가 그들의 기대를 수행하는건 '고마운' 일이 아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안부 연락이나 집안일 돕기 처럼 똑같은 일을 해도, 사위인 남편은 기본 0점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 로 점수를 쌓아갔다면, 며느리인 나는 -100점으로 시작해 겨우겨우 0점까지 도달해가는 느낌이었다.
'좋은 사위'가 되기는 쉬웠지만, '좋은 며느리'가 되기는 어려웠다. 애초에 사위와 며느리에게 주어진 기대값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깨달았다. ‘며느리’라는 자리는 나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맞지 않을 수 있다.
개인을 하나의 정해진 틀 안에 끼워넣는 순간, 관계는 어그러진다. 나를 억압하는 그 자리에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시험을 치를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미 나로서 충분한건데, 누군가 만들어놓은 기준 안에서 평가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결혼 제도 안에서는 늘 시험지가 주어지고, 평가가 내려졌다. 그 불합리한 구조가 숨 막혔다. 며느리라는 이름이 누군가에게는 소속감을 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구속이었다.
1년 남짓한 결혼 생활에서 확실히 깨달은 것은, 나는 결혼 체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괜찮다. 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사람이고, 오히려 그게 더 나다웠다.
억지로 체질을 바꾸느니, 혼자의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