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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한 여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돈'이겠지

2부.결혼에 관한 고찰(2)

by 유해나

모든 일이 그렇듯, 결혼 생활도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가장 크게 체감했던 결혼의 장점은 단연 경제적 안정이었다.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과 맞벌이로 번 돈이 모이니, 생활이 꽤나 넉넉했다. 사고 싶으면 사고, 가고 싶으면 가고,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었다.


늘 아껴야 한다고 말은 했지만, 아직 애도 없고 둘이 버니 괜찮겠지 하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 여유 덕분에 나는 돈에 매달리지 않는 삶을 잠깐이나마 맛보았다.


몇백 원, 몇천 원을 아끼느라 저렴한 메뉴를 고르던 때와 달리, 가장 먹고 싶은 걸 주문할 수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선물하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넉넉지 못한 어린 시절은 내게 늘 결핍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경제적 안정에서 오는 행복을 누구보다도 크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신혼집에서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는 아직도 생생하다. 새 아파트 거실에 커다란 트리를 세워두고 소파에 앉아 불빛을 바라보는데, 설명하기 어려운 행복이 밀려왔다.


복닥복닥한 좁은 집에서 내 방도 없이 지내던 아이가, 어느새 번듯한 아파트와 반짝이는 트리를 가진 ‘중산층의 어른’이 되어 있었다.


트리의 불빛이 반짝일 때마다 내 안의 어린 내가 위로받는 것 같았다. 그때의 감각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프로포즈를 받았던 날의 황홀함도 잊을 수 없다. 5성급 호텔, 명품 선물, 통창 밖으로 넘실거리는 한강의 불빛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 인생이 한 편의 영화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 화려함 속에서 ‘이 사람과 함께라면 이런 삶을 누릴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자리 잡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화려한 이벤트보다도 중요한 건 그걸 통해 내가 ‘누릴 자격이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는 점이다.


그 믿음이 남편에 대한 애정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와 함께 하는 이 삶을 오래도록 이어가고 싶게 했다.




경제적 여유는 시간적 여유로도 이어졌다. 남편의 높은 소득 덕분에 결혼 후 주 3일만 일하는 곳으로 이직할 수 있었다. 돈이 급하지 않으니 적당히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탐색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결혼해서 생긴 안정은 단순히 통장 잔고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돈 때문에 억지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일할 수 있다는 감각. 그 자유 속에서 나는 조금은 더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내게 분명한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선물이나 공간, 그리고 안정된 생활이라는 ‘형태’를 통해 더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내 사랑의 언어였고, 남편과 함께일 때 내가 받은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나는 중요한 걸 간과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이다.


주 3일만 일하게 된 순간부터 균형이 깨졌다. 둘 다 바쁘게 일할 때는 집안일을 나눠서 했지만, 이제는 시간이 많은 내가 더 맡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생겼다.


남편이 직접적으로 요구한 적은 없었음에도 왠지 눈치가 보이고 내 스스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나는 일도 하면서, 대부분의 집안일도 맡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게 나와 전혀 맞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집안일에 재능도, 흥미도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회사 일에서 훨씬 더 잘 해내고, 거기서 만족감을 느꼈다.


그런데도 "언젠가는 아이를 낳게 될 테니 어차피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되겠지"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게다가 출산과 육아가 시작되면 이 불균형은 더 심해질 것이 분명했다. 엄마가 된 나는 자연스럽게 더 많은 몫을 떠안게 될거고, 육아와 병행 가능한 직장을 다니려면 수입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전업주부로 사는 건 내 성격상 맞지 않을 테니, 결국 일도 하면서 육아나 집안일도 남편보다 많이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뒤처지고, 마음의 짐은 늘 안고 살아야 한다.


그게 워킹맘의 현실이라면, 나는 그런 삶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앞서 나는 결혼의 장점을 경제적 안정이라 말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일 뿐, 모든 여자가 결혼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얻는 것도 아니다.


남편의 수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책임감이 부족하다면, 결혼은 오히려 더 큰 짐이 될 수도 있다. 차라리 혼자 벌어 쓰는 게 편할 만큼, 삶이 더 빠듯하고 불안정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니 결혼이 곧 안정으로 이어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운 좋게 성실한 남편을 만났다고 해도, 경제적 안정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불확실한 조건일 뿐이다. 남편의 회사가 어려워지거나 해고를 당한다면, 내가 가장이 되어야 하는 순간도 올 수 있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이미 대학생 시절부터 투잡을 하며 꾸준한 저축과 재테크를 이어왔고, 신혼집 매매나 가계부 관리 역시 내가 주도했다. 경제적 안정은 남편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스스로 만들어온 부분이 컸던 셈이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내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을. 결혼이 안겨주었던 풍요는 잠시였고, 그 대가로 남은 불편함은 오래도록 나를 짓눌렀다.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안정을 이유로 나에게 맞지 않는 결혼의 틀에 갇혀 있기보다는, 조금 더 소박하더라도 내 마음이 편안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는 걸.


결혼은 선택일 뿐이지만, 자립은 생존의 조건이었다. 내가 진짜로 붙들어야 할 건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나를 지탱해 줄 경제적 힘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이혼한 여자에게, 아니 누구에게나 필요한 가장 확실한 안전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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