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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Mar 31. 2017

Travel Photo Essay_떠나야 보이는 것들

6. 비오는 시체스에서 혼자(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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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관에 도착했고, 곧 예매한 영화의 입장이 시작되었다. 몸이 붕 떠있는 느낌을 감추려 애썼다. 힘을 잔뜩 준 노력 덕분인지 그 누구도 내가 샹그리아 한 잔 마시고 취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1966년 미국 텍사스 주의 테러 사건을 다룬 <Tower>라는 영화였다. 지정좌석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 가는 대로 앉아버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Cinema Prado는 참 작고 오래된 극장이었다. 시체스 영화제를 위해 꾸며놓은 듯한 어설픈 내부 장식이 귀여웠다. 특이하게도 상영관 내부에 화장실이 있었고, 역시 낙후되어 있었다. 심지어 건물 안에는 사람들이 대기할 만한 여유공간이 없어서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바깥까지 줄을 서 입장을 기다렸다. 분명 한국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법한 옛 극장의 모습. 하지만 누구도 이 불편을 짜증스러워하지 않았고, 관객들의 표정에는 영화에 대한 기대와 흥분만이 가득했다. 대형 극장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던 내겐 그 모습들 하나하나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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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꺼졌다. 영화가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취기 때문에 몰입이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생수를 들이켰고, 덕분에 상영 도중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하지만 살짝 졸았을지언정 잠이 드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순전히 <Tower>라는 영화가 무척 좋았기 때문이다. 실사 인터뷰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이 미국 영화는 비극적 역사를 지극히 새로운 방식으로 담겠다는 야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영화 <Tower>(2016)의 포스터.


엔딩 크레딧과 함께 울려퍼지는 박수갈채.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도 매 년 경험하긴 하지만, 영화에 대한 이들의 환호는 대단했다. 나 역시 상태가 엉망진창인 이 관객을 재우지 않고 끌고 간 영화의 힘에 경의를 표하며 힘찬 박수를 보냈다. 어느새 몸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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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 비가 그쳐 있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유감스럽게도 날씨는 그대로였다. 조금 나아진 상태였지만, 해안가로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야 할까. 고민이 시작됨과 동시에 무척 강렬한 허기를 느꼈다. 일단 뭘 좀 먹고 다시 생각하자. 와이파이가 된다고 써붙여 놓은 동네의 어느 식당으로 들어가 타파스 두 개를 시켰다. 


미트볼과 감자 타파스. 그리고 내가 술을 깰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생수.


아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양도 많고 맛도 좋았다. 아무런 정보 없이 그냥 들어온 곳 치고는 만족스러운 식사. 그 사실 하나로도 내가 아주 불운한 여행자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먹는 도중 밖이 아주 조금씩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마침내, 비가 그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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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해안가로 나갈 용기가 생겼다. 똑같은 길인데 아까와는 달랐다. 한 주택의 예쁜 색감도,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도, 모두 잘 보였다. 굳어 있던 내 표정에도 미소가 생겼다. 마치 처음 온 길인 듯, 즐겁게 생소했다. 날씨가 좋아지리라는 대책 없는 기대 없이 실망감만 품은 채 바르셀로나에 돌아갔다면 전혀 느낄 수 없었을 소중한 감정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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휑하던 몇 시간 전과는 달리 꽤 많은 사람들이 비 그친 시체스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영화제 관련 물품을 파는 부스들도 모두 열렸다. 그제야 시체스의 감흥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로 산책 나온 가족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천천히 이 모든 풍경을 음미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샹그리아를 먹었던 그 가게 근처까지 걸어왔다. 그런데 그 이름 없는 가게 역시 Vivero처럼 닫혀 있었다. 아마도 내가 그 날의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었으리라. 그 날, 그 시간, 그 자리, 샹그리아 한 잔에 취해 버렸던 물에 빠진 생쥐 한 마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오로지 내 몫의 기억으로 남았다. 무심했던 그 남자 직원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왼쪽이 내가 있었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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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여행의 시간은 평소보다 조금 빨리 흐르기도, 늦게 흐르기도 한다. 

그 제멋대로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면, 일상의 시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파도의 결, 길의 시작과 끝, 한 남자의 묵직한 뒷모습. 

이 모든 모습들이 생생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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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란 지중해는 끝내 볼 수 없었지만, 흐리고 아무도 없는 시체스의 해변은 오롯이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 특별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지중해에 발이라도 담궈 보기로 했다. 양말과 신발을 벗고 바닷가를 향해 걸어갔다. 가을 바다는 차가웠지만 곱디 고운 모래와 조금은 거친 파도가 조화로웠다. 비가 왔던 시체스의 해변에서 혼자, 그렇게 몇 분 간 맨발의 자유를 누렸다.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 같았겠지만, 누구도 보고 있지 않아 괜찮았다. 


모래 덕분에 발이 꾀죄죄해졌지만, 뭐 어때.


돌아가서도 시체스를 기억하고 싶었다. '파란만장한' 하루였지만, 그 또한 심히 유쾌한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걸 미래의 나에게 계속 알려주고 싶었다. 해변에서 나와 영화제 굿즈가 있는 부스에서 'SITGES'가 새겨진 검은 모자를 하나 사왔다. 지금도 종종 쓰고 다니는 그 모자 속에 이 모든 추억과 사연들이 담겨 있어서인지, 쓸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언젠가는 꼭 화창한 시체스를 보러 가야지. 그리 멀지 않은 미래가 되기를.


인스타그램에 썼다. "시체스에서 있었던 일들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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