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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Mar 31. 2017

Travel Photo Essay_떠나야 보이는 것들

7. 그 여름에 불어온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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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 경주를 가본 사람이라면, 한여름에 경주로 여행을 떠나는 게 어떤 경험일지 알 테다. 온도와 햇빛만으로 계란도 익힌다는 대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경주도 더위로 치면 참 만만찮다. 그런데 난 그걸 몰랐다. 8월 초, 과감히 혼자 경주로 향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당일치기였다. 혼자, 즉흥적으로, 무궁화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 

기차에는 창 밖 모습과 규칙적인 소리,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 뜻없이 지나쳐가던 풍경들이 별안간 눈이 아닌 마음 속에 박히는 순간들이 있다. 기차 여행은 그래서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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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앱은 경주역에서 대릉원까지 도보로 15-20분쯤 걸린다고 알려준다. 호기롭게 걸어서 가보기로 결정했지만, 아무리 20대라도 땡볕에 그 정도 거리를 걷는 게 걱정스럽기도 했다. 포카리스웨트 한 통을 사들고 길을 나섰다. (안 샀으면 큰 일 날 뻔 했다.)


'크고 작은 신라시대 무덤들이 밀집되어 있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여전히 경주에는 신라의 역사가 군데군데 살아 숨쉬고 있다. 걸어가는 와중에도 무덤과 유적지들을 끊임없이 만날 수 있었다. 비록 머릿속에는 '덥다'는 단어만 가득 차고 있었지만. 더위를 잘 안 타는 편이라서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왔거늘, 심각하게 더웠다. 갈수록 더워지는 여름에서 시작해 지구 온난화에까지 미친 잡생각이 마무리될 때쯤, 스타벅스 대릉원점이 눈에 띄었다. 좌식을 갖춘 한옥 스타벅스라 유명해진 곳이다. 들어가서 무조건 시원한 음료를 하나 시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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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앉아 녹차 프라푸치노를 마시며 생각했다. 여기 왜 왔지. 나는 누구지.

여행이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만 가져다주는 건 아니니까. 체력도 좋지 않은 주제에 무모한 생각을 했던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다시 밖으로 나갈 엄두가 안 났지만, 이번엔 녹차 프라푸치노의 힘을 빌어 다시 길을 나섰다. 곧, 첨성대가 눈 앞에 나타났다. 어릴 때 봤던 모습 그대로이지만, 역사를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된 지금, 이 건축물은 더욱 멋스러워 보였다.



나와 같은 무모한 자들이 많아 보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 국토 종주 중인 듯 보이는 한 남자는 내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해왔다. 그 모습이 참 대단하고 멋있어 보여 흔쾌히, 신경써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는 도무지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몸에 딱 맞는 옷이 있듯이, 나에게 딱 맞는 여행이 있다. 

찾아 나서야만, 떠나야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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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첨성대 주변을 조금 돌아보다, 계림으로 가는 길목에 접어들었다. '닭이 울었다'고 하여 '계림'이 된 숲. 신라의 건국 초부터 있었다고 전해진단다. 옛 선조들이 밟고 다닌 그 길을 지금 내가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계림의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그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바람의 감촉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너무 춥지도, 그렇다고 덥지도 않은, 계림만의 온도. 불과 몇 발자국 차이일 뿐인데, 무더위는 남 말이 되어 버렸다. 그 기분 좋은 시원함, 선조들도 사랑하고 보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울창한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주었다. 계림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거기서 몇 시간을 보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모든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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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쉬었다 가요

그늘에 몸을 기대 봐요

다 보여요

땀 흘리다 지친 길이 아름다운 걸

('그늘' 中, 윤종신)


이어폰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은 여행의 감흥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이 노래도 그랬다. 계림의 매미 소리와 노래 속 매미 소리가 한 목소리를 냈다. 가사 하나하나가 모두 내 이야기였다. 물론 이 노래 속 가사처럼 한 숨 푹 잘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도 '가다 가다 그늘이면 꼭 한 번은 쉬어 가'기로 다짐했다. 

다음 걸음을 위한 쉼. 그 쉼에 앞으로도 인색하지 않기를. 


계림의 품에 안겨 바라본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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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의 바람은 내게 석빙고까지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비록 석빙고가 개방되어 있지 않아 큰 소득은 없었고, 가는 길은 공사현장에 가까웠지만. 비록 더워서 헥헥거리느라 경주의 아름다움을 모두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계림이 준 그 위안과 평화만으로도 족했다. 그 바람은 부드러웠고, 또한 힘이 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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