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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Mar 31. 2017

Travel Photo Essay_떠나야 보이는 것들

5. 비 오는 시체스에서 혼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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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스는 바르셀로나를 관광하는 여행자들이 한 번쯤 들르거나, 염두에 두는 근교 휴양지다. 게이 누드 비치와 '시체스 영화제'로도 잘 알려진 그 곳. 운 좋게도 내가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동안 시체스 영화제가 열린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여행일정 중 하루를 시체스에 할애하기로 결정하고, 상영작 중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미국 영화 한 편을 출발 전 예매해 두었다. 


귀국을 이틀 앞둔 월요일, 시체스로 향하는 몬버스(현지 시외버스의 일종)에 몸을 실었다. 렌페로 이동하는 것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번거롭게 갈아탈 필요 없이 한 번에 시체스까지 데려다 준다. 게다가 까탈루냐 광장 등 시내 곳곳에 정류장이 있어 숙소와 최대한 가까운 정류장을 선택해 탈 수도 있다. 내가 탄 몬버스의 운전자는 시크한 금발의 여성이었다. 



버스는 서서히 바르셀로나를 벗어났다. 간판이나 건물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외곽. 뜻을 알 수 없는 스페인 노래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 외에는 한국의 시골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어느새 눈꺼풀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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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조는 사이 버스는 시체스에 훨씬 가까워졌다. 이번에도 날씨는 내 편이 아니었다. 후두두둑, 사뭇 불길한 비 내리는 소리. 시체스는 지중해의 푸르른 바다를 보고 싶어 찾는 곳인데, 대신 흐린 하늘과 성난 파도를 보게 생겼다. 우산도 없었다. 그래도 큰 비가 아닌 게 어딘가. 유럽인들은 참 의연하게 비를 맞으면서 걸어다닌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이미 이골이 난 듯 보였다. 나도 유럽인인 양 호기롭게 비를 맞으며 시체스에 첫 발을 내딛었다. 


후두둑, 후두둑. 영화제 기간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궂은 날씨에도 사람들의 표정에는 활기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비만 맞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예매한 영화가 시작하려면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었고, 비는 그치지 않았으며, 점심을 먹어야 했다. 작은 카페에 들어가 빵과 커피를 먹었다. 그 사이 비는 조금 그친 듯 보였고, 음식을 섭취한 여행자는 의욕을 다시 충전하고야 말았다. '해안가로 한 번 나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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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스는 그리 큰 도시가 아니다. 상영관(cinema prado)에서 10-15분만 걸으면 해안에 닿는다. 해안가에는 탁 트인 테라스로 유명한 레스토랑(카페와 바도 겸하고 있다) Vivero가 있다. 여행 계획을 짤 때부터 염두에 두었던 곳이라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했다.


그런데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빗방울은 더욱 굵어졌다. 의연히 비를 맞던 유럽인들은 다 어디 가고, 나를 제외한 모두 우산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가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점점 내 모습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갔다. 그 꼴로 겨우겨우 Vivero에 도착했다. Vivero 앞에서 비는 가장 심하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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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원이 난색을 표한다. 비가 많이 와서 오늘은 바를 이용할 수 없고, 건물 안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만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레스토랑은 가난한 여행자가 누리기엔 너무 호사스러운 식사였다. 황망해진 채 다시 비를 맞으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간 10-15분 거리를 다시 쫄딱 젖은 채 걷게 생겼다. 설상가상, 안경이 젖어 자꾸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 때, 마침 Vivero 위에 있는 한 작은 바가 눈에 띄었다. 직원도 있었고, 천막도 채 걷지 않은 상태.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지금 이용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참으로 감격스러웠던 그의 대답. "Yes."



아무도 오지 않는 날씨를 뚫고 한 동양인 여자가 술을 주문하려고 한다. 퍽 이상해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그 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했다. 그 무심한 태도가 내심 참 고마웠다. 심지어 친절의 일환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얼른 뭐라도 시켜야겠기에, 생소한 이름의 음료들을 뒤로 한 채 오렌지가 담긴 샹그리아 한 잔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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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그리아를 받아들고 조심스레 의자에 앉아 비를 바라봤다. 그 때 그 제주의 비가 자꾸 떠올라 마음이 쓰였다. 이쯤 되면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아닐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샹그리아가 참 맛있었다는 것과 비가 갈수록 그쳐가고 있었다는 것. 덕분에 쫄딱 젖은 몸과 마음이 모두 나아졌다. 비 오는 바에서 나 홀로 샹그리아 한 잔이라니, 낭만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끔 이렇게 작은 행복이 절실할 때가 있다. 

그 자그마한 행복에는,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불행 속에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알려주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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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행복했나보다. 난생 처음 '취기'를 느꼈다.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 편이지만, 마신다고 해서 신체적인 반응을 느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중심이 흔들렸다. 

대낮에, 여행지에서, 그것도 영화 관람을 앞두고 있는데 취기라니! 

처음 겪어보는 상황, 당혹 그 자체였다. 절대 취객처럼 보여선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온 몸에 힘을 잔뜩 준 채 영화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 생수 한 병을 샀다. 벌컥벌컥 들이켰다. 

제발 영화가 시작하기 전까진 술이 깨기를 빌고 또 빌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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