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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Mar 26. 2017

Travel Photo Essay_떠나야 보이는 것들

4. 비와 바람, 제주의 첫인상(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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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첫 제주의 강렬한 기억을 뒤로 한 채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고, 스페인을 다녀왔으며, 스물 일곱이 아닌 스물 여덟이 되었다. 무수한 변화 속에서도 제주는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1년 전 용두암에서 잠깐 맛보았던 그 푸른 풍경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결국, 항공권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 때와 달리 자유인의 신분이 된 나는 여유로운 일정과 저렴한 항공료를 만끽할 수 있었다. 11월의 제주에 태풍같은 건 없을 거야, 굳게 믿으며 다시 짐을 쌌다.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하늘이 잿빛이다. 순간 마음도 한 줌 재로 변했다. 비만 오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게다가 이번엔 하루도 아니고 3일을 머무르게 되니, 적어도 하루는 맑은 날이 있겠지. 원래 나는 긍정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떤 일을 앞두든 걱정이 앞서고, 불안을 친구 삼아 살아간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래선 안 된다. 불확실성으로 똘똘 뭉친 '여행'이라는 행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없던 낙관도 만들어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삶도 하나의 여행이라면, 왜 그리도 다들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지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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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서 만들어 낸 긍정의 힘이 통했던 걸까. 가끔 흐릴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돌아다니는 동안 내내 제주의 높은 가을 하늘과 깊은 바다를 정말이지 원없이 볼 수 있었다. 제주의 예쁜 모습을 나의 카메라로 담을 수 있는 게 꿈만 같았다. 딱 1년 전 느낀 실망감만큼의 크기로 기쁨이 찾아왔다. 



다만, 제주도에 특히 많다는 세 가지 중 하나, 바람은 여행 내내 매섭게 몰아쳤다. 

덕분에 11월의 제주는 거의 초겨울인양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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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대해서라면 용눈이오름 이야기를 꼭 해야 한다. 



제주에서의 두 번째 날, 맑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침 일찍 비자림 산책을 마친 후 곧장 차를 몰아 용눈이오름으로 향했다. 지난 번엔 '오름'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했던 터라, 마음이 두둥실 부풀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헤맸다. 말을 방목해 키우는 사유지인 탓에 입구가 작고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장.



생각보다 길이 가팔랐고, 비자림에서도 많이 걸은 탓에 다리가 조금 휘청거렸지만 버틸 만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말똥을 피해가며 오름을 올랐다. 


중턱에서부터 바람은 심상치 않았다. 낭만을 만끽하며 걸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길은 꼭대기에서 내리막으로, 다시 꼭대기로 그 끝을 따라 나 있었다. 첫 번째 정상 정복(?)의 순간,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말았다. 다음 걸음을 딛기 위해 발을 땅에서 떼는 순간 몸의 무게중심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길은 닦여 있었지만, 잡을 수 있는 그 어떤 손잡이도 없었다. 길 뿐인 길에서 나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한라산, 성산일출봉 등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절경이 눈 앞에 펼쳐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러다 굴러 떨어지는 건 아닐까. 구를 땐 앞구르기로 굴러야 하나? 그러다 말이랑 부딪히면 어떡해?

여행을 시작하며 겨우 쥐어 짜낸 긍정은 이미 어디론가 증발한 후였다. 

저 아래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안락한 렌트카가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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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순간, 비바람을 뚫고 애월에서 서귀포까지 운전했던 초보 운전자의 오기가 다시 발동했다. 그래도 올라왔는데 한 바퀴는 돌아야지. 또 비록 일행은 없었지만, 그 순간 함께 용눈이오름을 오르고 있던 사람들을 보며 용기를 얻었음은 물론이다. 일단, 앞으로 전진.



바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때로는 멈춰서야 할만큼 심하게 몰아치기도 했다. 오르막에는 비교적 잠잠하다가도, 높은 곳에 올라서는 순간부터 내리막까진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거셌다. 등 뒤에서 나를 떠밀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편에서부터 불어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던, 바람. 그 불가항력에 적응해가며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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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지라도, 
언젠가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힘입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게 될 때가 반드시 오리라는 믿음.
휘청이는 존재에게 꼭 필요한 마음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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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난리를 겪으면서도 카메라의 셔터 누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몸을 가누기 힘든 것과 별개로, 오름 주변의 모든 것은 그저 근사하고 아름답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넓게 펼쳐진 초원, 이를 새파랗게 감싸고 있는 바다.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 없는 그림같은 풍경들이 나를 끝까지 걷게 만들었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양 옆을, 위 아래를 살펴보며 걸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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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당연하게도 오름에서 아무 탈 없이 귀환한 후, 점심을 먹기 위해 1년 만에 다시 서귀포를 찾았다. 나도 모르게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 다시 이중섭 거리를 걷게 될 줄이야.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괜히 반가운 마음에 그 때 그 카페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없었다. 분명히 여기였던 것 같은데, 다른 가게가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라진 연유는 알 수 없었다. 

순간 그 때 이 곳에서 보냈던 모든 시간들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테라스에 앉아 신세를 한탄했던 카페는 사라졌고, 이번 여행을 통해 1년 전의 아픔과 아쉬움 역시 사라졌다. 카페 주인에게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무척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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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st is in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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