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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Mar 24. 2017

Travel Photo Essay_떠나야 보이는 것들

3. 비와 바람, 제주의 첫인상(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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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월급이란 걸 받아들고, 그 돈으로 난생 처음 제주도로 향하던 길. 일기예보가 좋지 않아 걱정했지만 설마, 뭐 대단한 일 날려구. 괜찮을 거야.


다른 사람들도 다 잘만 다녀오는 곳이잖아?


생각해보니 이 질문에는 나도 모르게 뼈가 담겨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가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여행을 갈망하고 사랑하는 나는 여행과 별 인연이 없었다. 특히 제주도는, 27년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마음 한 구석 아쉬움이 켜켜이 쌓여 있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어쨌든, 이제 그 아쉬움도 옛날 일이 될 터. 그래서인지 제주행 비행기를 타러 가던 내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김해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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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비행기로 내려갔으니,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여행에 쏟아 부어야 했다. 일요일 오전에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야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게 짧았지만, 첫 제주도라는 설렘에 그 정도의 제약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루라도 잘 맛보다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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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일을 하고 계신 친한 언니 집에서 밤을 보내고, 토요일이 다가왔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오늘 내내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나를 반겼다. '찬홈'이라는 태풍의 여파였다. 물론 예상했던 바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섬은 워낙 날씨가 변덕스럽다고 하니, 조금 나아질 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대감마저 있었다. 비록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더럭분교


제주 시내에서 애월의 더럭분교로 향했을 때만 해도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제주현대미술관에 도착하자 폭우로 돌변했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과 달리 운전도 무척 서툴렀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 하루 뿐, 최선을 다해서 즐겨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히 미술관의 다양한 작품들은 마음의 불안을 잠시나마 잠재워주었다. 예술작품만이 줄 수 있는 위로와 평안이 이토록 소중했던 순간이 또 있었을까.


그 와중에도 사진을 찍는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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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되어 있던 다음 일정은 '생각하는 정원'이었지만, 생각은 커녕 옷만 쫄딱 젖어버릴 것 같아 곧장 오설록으로 향했다. 나와 같은 처지의 많은 관광객들로 오설록은 북적였다. 그러나 주차를 다 하고 난 후에도 차마 건물로 이동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모두 비명을 지르며 우산이 뒤집히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27년만에 어떻게 온 제주도인데, 이리 허무하게 돌아갈 순 없었다. 마침내 우산을 집어들고 렌트카의 문을 열었다. 쫄딱 젖은 채 오설록에 입성했음은 물론이다. 유명한 롤케이크 하나를 사 다시 쫄딱 젖으며 차로 돌아왔다.


선택해야 했다. 서귀포까지 넘어가 볼 것이냐, 적당히 실내에서 시간을 떼울 것이냐. 하지만 안주하기엔 이제껏 폭우를 뚫고 벌벌 떨며 운전한 시간이 참 아깝게 느껴졌다. 오기로 똘똘 뭉친 나는 결국 서귀포로 향하는 것을 선택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극심한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초보운전자에게 비와 바람이 몰아치는 날의 운전은 지나치게 난이도가 높았으니까. 혼잣말을 했다.

"괜찮아, 괜찮아. 잘 하고 있어."

정말 잘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믿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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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해 고픈 배를 부여잡고 이중섭 미술관에 도착했다. 고생 끝에 도착했지만, 미술관은 의외로 실망스러웠다. 이중섭의 작품이 많지도 않았고, 볼 거리도 빈약했다. 조금은 허탈해진 발걸음으로 비바람을 뚫으며 근처 테라스가 있는 한 카페로 향했다. 더 이상 어디론가 이동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끝내, 고갈.

냐옹~


독특한 실내 디자인과 테라스에서 여유롭게 낮잠을 청하는 고양이가 인상적인 카페였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실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만히 비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몇 시간 동안 참고 있던 처참한 기분이 몰려왔다. 하늘도 무심하다, 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설상가상, 샌드위치마저 주문한 것과 다른 것이 나왔다. 정정할 힘도 남아있지 않아 그냥 주는대로 먹었는데, 원했던 맛도 아니었다. 아, 제주는 왜 내게 이렇게 텃세를 심하게 부리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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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문자를 한 통 받았다. 결항이란다. 일단 공항으로 오란다.

졸린 눈을 비벼 겨우 제주공항에 도착했는데, 이미 대기표를 받기 위한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기다림 끝에 받아낸 숫자는 세 자리. 거의 모든 사람의 발이 묶였다. 공항 한 구석에 주저앉아서 막연히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제주에 살고 있는 친한 언니도 한 번 겪어본 적이 없다는 결항을, 처음 온 내가 겪게 되다니. 이 사태를 취재하러 나온 기자들도 볼 수 있었고, 공항 직원이 빵과 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이러려고 제주까지 왔던가.


여행도, 인생도,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행운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아수라장이 된 제주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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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공항에 발이 묶여 있었는데, 결국 '오늘 안에는 힘들겠으니 모두 돌아가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다음 날 새벽, 아침에 출발하는 특별기 항공권을 가까스로 받아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날 아침 제주는 참 날씨가 좋았다. 마치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가까스로 가라앉혔던 화가 다시 났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참지 못하고 공항을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단 몇 분만이라도 맑은 제주 바다를 보고 돌아가야겠기에, 공항과 가장 가까운 용두암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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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난리를 겪고 마지막에 잠시 마주했던 제주의 푸른 바다, 아름다웠다. 10분 후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억울하고 약 올랐지만, 10분이라도 보고 나니, 문드러진 줄 알았던 마음이 썩 괜찮아졌다. 그렇게 억울하면 다음에 다시 오라고, 그 때는 꼭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제주가 내게 말했다.


약 1년 후, 다시 제주를 찾았을 때 제주도는 고맙게도 그 약속을 지켜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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