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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Sep 14. 2020

1. 내향인은 오늘도 고민한다


  익숙한 공간인 사무실을 나선다.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저 사람은 2주 전 새로 이 부서에 발령받은 실장님인 것 같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데 잘못 인사했다가 실수하면 어떡하지. 몇 걸음만 더 가면 잘 보이겠지. 그렇게 그 실루엣과 나의 거리는 점점 좁혀진다. 약 20m 쯤 남았을 때 나는 확신한다. 아, 저 분은 실장님이 맞아. 그래, 몇 걸음만 더 가서 인사를 하면 되겠지. 그러다 그 분과 나는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만다. 몇 걸음 뒤 인사를 하려던 나의 나름대로 치밀한 임기응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급하고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니 이미 실장님은 어떤 문을 열고 들어가버린 후다. 고민은 또 시작된다. 나를 보셨나. 분명히 보셨겠지. 아, 방금 전 그 이상한 인사도 다 보셨겠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아냐, 뭘 이 정도 가지고 사람을 이상하다고 여기겠어. 이 생각의 흐름을 다 쓰고 보면 정말 많은 시간을 쓰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단 10초 동안에도 이런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뇌 어딘가에 똬리를 튼다. 


 전화를 한 통 하려 해도 고민을 한다. 특히 잘 모르는 상대와 통화를 해야 할 때는 처음 건네는 인사부터 고민스럽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 무례하지는 않을까. 정 껄끄러운 전화일 때는 아예 한글 창을 띄워두고 해야 할 말을 적당히 써보기도 한다. 안.녕.하.십.니.까. 보다는 안.녕.하.세.요.가 더 자연스럽겠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나. 우선 내 안에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인출이 여간해선 쉽지 않은 내향인의 삶이 이렇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의 난이도가 극상이다. 물론 내향인들도 사회에 적응해 잘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고, 그렇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대책을 찾는다. 그러면 고민의 시간이 사회 초년생일 때보다는 분명 짧아져 있다. 소모되는 내적 에너지 역시 조금 적다. 하지만 시간을 단축시킨다고 해서 그 과정이 아예 생략되는 것은 아니며, 어쩌면 사람에 따라 그 과정의 생략이 영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 사회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소시민 내향인의 또 다른 고민이다. 평생 이런 피로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게 아득하고 끔찍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면 또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타고난 성격과 성향을 감쪽같이 숨기고 활달하게 행동해볼까. 아니면 내 성격과 성향이 맞는 직장을 좀 더 찾아봐야 할까. 이 고민이 특히 깊어질 때는 소속된 조직 전체가 외향성을 선호한다는 신호를 온몸으로 받을 때이다. 가뜩이나 사람을 대할 때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게 마련인 내향인이 외향성을 ‘흉내’내기 시작하는 순간, 방전을 피할 수 없다. 일의 성취를 통해 얻는 보람으로도 다 메울 수 없는 내면의 구멍이 커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일도 좋고 이 조직도 탄탄한데, 왜 나는 힘들까.’ 이 고민이 한 번 시작되면 여간해선 멈추기가 쉽지 않다. 내향인이 왜 내향인인가. 자아의 안으로, 안으로, 외향인보다 몇 겹 더 들어와 있는 인간, 에너지의 방향이 내면을 향해 있는 인간, 그게 내향인 아닌가. 그 에너지를 온통 고민에 빼앗겨 버리면 밖으로 빼낼 에너지는 고갈되고 만다. 


 생각이 돌고 돌고 또 돌아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온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 또한 숱하게 이런 고민을 해왔고, 또한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당신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내향성을 유지해오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아마 노력해왔을 것이다. 이런 나를 바꿔보려고, 부정해보려고, 극복해보려고. 또한 고민했을 것이다. 어떡해야 바뀔지, 어떡해야 그들이 원하는 인간이 될 수 있을지, 어떡해야 본성을 극복할 수 있을지. 하지만 인간은 인간일 뿐 로봇도, 몬스터도 아니며, 따라서 변신할 수 없다. 아주 천천히, 또 조금씩 변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바뀌기 쉽지 않을 나의 일부를 직시하고 인정하는 길이 남아 있다. 그 길에서는 긍정적인 변화도 촉진된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고민을 한다. 외향인을 내심 더 좋아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내향인으로서의 나를 똑바로, 괴롭지 않게 바라볼 수 있을까. 아직은 괴롭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렵고 힘든 나의 모습이. 고민이 너무 너무 많은 나의 내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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