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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론가 Jul 01. 2016

1. Reject _1

거절하다. 거부하다.

  내 인생에 더 많은 ‘거절’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는 있다. 적어도 머리로는. 대학에 입학 할 때도 많은 ‘거절’을 경험했다. 몇 개의 수시원서, 그리고 정시까지. 결국 한 학교의 ‘승낙’을 받아내고, 그렇게 나는 또 5년을 보냈다. 매번 확인 할 때마다 마치 영화 속 주홍글씨처럼 빨갛게 뜨던 ‘불합격’이라는 글씨.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아니다. 대수롭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파란 색으로 뜰 ‘합격’이라는 글씨를 기다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 그렇게 모든 수시를 빨간색 불합격과 함께 끝내고, 이제는 3개의 선택만을 가진 정시 지원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게는 정말 다행히도 지금 우리학교로부터 파란색 ‘합격’ 통보를 받고 대학생을 시작했다.


  기쁨도 잠시, 안도도 잠시.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더 좋은 대학에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즐겁지 않은 1학년을 보냈다. 동기들과 함께 했지만 재미없었고, 내 인생에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즐겁지 않았다. 그냥 내게 또 다른 돌파구는 없을까 생각을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고. 그리고 나는 2학년 때, 내게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 방법 하나를 찾았다. ‘편입’

생각해보면 대학 입시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학원에 가서 새벽수업을 듣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10시 오전 수업을 듣고, 오후 5시에 학교수업이 끝나면 다시 학원으로 가 특강을 듣고, 공부를 하고 밤 11시, 12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할 수 있을 거라 패기 넘치게 시작했던 편입 공부가 시간이 갈수록 날이 추워질수록 지치고 힘들었지만 상상했다. 다른 학교에 있는 나를. 아니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자신감 넘치는 나를. 자존감 넘치는 나를. 그리고 12월, 1월. 편입 입시가 다가왔다. 미친 듯이 오르는 경쟁률에 그 숫자가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표시되었다. 한 과에 고작 1명에서 2명을 뽑는 바늘구멍보다 더 작은 구멍에 내가 들어갈 수 있을까. 그래도 다시 상상했다, 학교를 옮긴 나를. 하지만 어김없이 또 실패. 실패. 실패.



물론 재수는 하지 않았으니 ‘실패’라고 단정 짓기 힘들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내게는 ‘작은 실패’였다. 내 인생 처음으로 마주한 실패는 달콤할 수 없었고, 내게 약이 될 거란 생각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아직도 실패가 약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할 수도 없었던 그 때에 또 한 번의 실패가 찾아왔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입시를 실패했다. 2학년, 1년을 정말 힘들게 지내왔었다. 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학교 과제와 시험에, 학원 과제, 시험까지. ‘간절하게 원하면 된다.’가 ‘너무 간절하게 원하면 안 된다.’로 내 생각이 변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2월이 가고, 3월이 찾아왔다. 3학년을 다녀야 했는데, 다닐 수 없었다. 힘든 1년의 시간동안 방전되기도 했었지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왜 나는 안 될까. 이것도, 저것도 안 될까.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일까. 그렇게 한동안 방 안에서 드라마만 몰아서 보고 또 보고. 그리고 결국 휴학을 결정했다. 이 상태로는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무작정 부모님에게 휴학을 선포했다. ‘휴학을 하고 싶어요.’가 아니라 ‘난 지금 아무것도 못해. 나 휴학한다.’였다. 그게 개강을 일주일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아빠는 내게 ‘어학연수를 가지 않을래?’ 제안하셨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항상 꿈꿔왔던 일이었으니까.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는 일, 내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바로 어학연수 준비가 시작되고, 그렇게 약 2달 후 호주 시드니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신났다. 너무 신났다. 떠나는 날, 정말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설레었다. 설레기만 했다. 너무 좋았다.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고, 내게 1년 동안 펼쳐질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떠나는 날, 날 배웅하기위해 함께 오셨던 엄마와 아빠는 날 신기하게 쳐다보셨다. ‘넌 안 무섭니?’라는 엄마의 질문에, ‘엄마 나 이제 들어가도 돼. 잘 다녀올게요. 도착하면 전화할게.’였다. 그렇게 1년 후를 기약한 채로 방긋방긋 웃으며 입국장 안으로 향했다. 10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호주 시드니. 호기롭게 픽업차량도 부르지 않겠다고 했었다. 홀로 택시를 타고 홈스테이를 할 집까지 갈 수 있다고. 그리고 어렵지 않게 택시를 타고 그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약 10개월,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시작되었다. 호주 시드니에서 내가 얻은 것은 너무 많다. 물론 영어까지 함께. 하지만 더 많은 것을 얻어온 소중한 시간들이다.


첫 번째, 나는 아직 너무나도 어리다. 1년 뒤 제대로 된 ‘영어’를 하고 싶었기에 웬만하면 한국인들과의 접촉을 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아예 모르고 살 수는 없다. 그렇게 알게 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나와 동갑이거나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적게는 나보다 1살이 많았고, 2-3살이 많은 언니들, 그리고 4-5살 많은 오빠들이 대부분이었다. 동갑과만 어울리던 내 좁은 인간관계에 가족들을 제외한 언니, 오빠들이 생긴 건 처음이었다. 그들과 마주하면서 ‘나는 어리다.’라는 것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저들도 용기 있게 호주 시드니까지 날아와 자신의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 나는? 나는 아직 너무나도 어리다.


두 번째, 영어를 잘한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영어회화를 습득했다. 물론 편입공부를 하는 동안 고3 수험생활 이후 놓았던 영어를 다시 공부한 게 도움이 되었다. 미친 듯이 이론을 공부하고, 딱 그 공부가 끝나자마자 회화를 늘린 느낌이랄까. 덕분에 나는 빠른 속도로 영어로 대화하는 법을 익혔다. 솔직히 딱히 힘들지도 않았고, 외국 생활이 외롭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가족과 있는 것만큼이야 편했겠냐마는 새로운 세상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처음으로 홀로 서기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아 좋았고, 이 생활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내는 내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예전부터 갈망했던 외국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좋았다.


세 번째, 여유가 생겼다. 호주 생활이 끝나가던 1월 말, 이제는 한국 가서 어떻게 살지에 대해서 고민해야했다. 아직 남은 대학생활 2년 동안 어떻게 살 건지 고민해야했다. 정할 수는 없어도, 확답을 내릴 수는 없어도 나는 고민해야했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열심히 즐기기로 했다. 왜 나는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을까. 가끔은 옆도 보고, 둘러가기도 하는 방법을 배웠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있는 페스티벌도 참석하고, 영화도 많이 보고 조금은 즐기자. 그래서 한국에 들어가기도 전에 여름에 하는 한 페스티벌 예매권도 사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1년 만에 밟아보는 고국의 땅! 이라고 외치기는 10개월은 사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건 5분 정도? 언제 내가 이 땅을 떠나 머나먼 호주 땅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바로 자연스러웠다. 저녁 늦게 도착했던 우리 집도 낯설기는 단 하룻밤. 다음 날부터 또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나의 일상을 보며 나도 흠칫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나는 약 1년의 외국생활을 끝내고, ‘여유’를 배워왔다. 많은 것들을 배워왔지만 그래도 ‘여유’를 가장 많이 배운 것 같다.  그 어떤 ‘거절’을 당하더라도 또 다시 일어설 ‘여유’가 있다고 자신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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