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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na Jan 15. 2018

어쨌거나 우리는 이방인일 수 밖에

낯선 장소보다 더 낯선 나의 위치 인정하기

유튜브를 뒤적이다보면 '인종차별 당한 이야기'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유난히 눈에 밟힌다. 어쩌다보니 중국에서 일 년의 휴학생활, 지금은 캐나다에서 일 년동안 교환학생을 하고 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데, 내 집도 내 나라도 떠나살고 있는 우리는 꽤나 고생을 하고 있나보다. 화면 안의 유튜버들이 생생하게 서럽고 억울했던 경험을 전하면 위 아래로 고개가 심히 끄덕여지곤 했다.

그래, 몇 개월 전 까지는 그랬다. 금발의 파란눈의 예쁘고 잘생긴 애들이 '아시안은 그렇다며~, 저렇다며~' 하며 꺄르르 웃으면 괜히 작아졌다. 간혹 길거리에서 무례하게 구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분노하며, 인종차별이라며 억울하다며 노발대발하기도 했다. 나는 왜 억울해야 할까, 나는 왜 속상해야 할까, 나는 왜 나는 왜.


나는 대학에서 사회복지와 경영을 공부한다. 가끔 두 학문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그건 한 쪽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이해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방면 다른 한 쪽은 어떻게 하면 자본이 더 큰 자본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가에 대한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까지 5년 째가 다 되가는 대학생활 중 내가 더 몰입을 할 수 있었던 수업은 경영학 수업이었다. 노인도, 차상위계층도, 장애인도 아닌 나는 아무래도 사회복지를 타자의 시선으로 공부해왔다. 사회적 약자가 아닌 나 자신이 이 사회에 공존하고 있는 평범한 범주 밖의 이들을 이해하는, 그런 과정이 나에게는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일이었다. 부끄럽게도 그래왔다.



간헐적 타국살이가 벌써 3년 째에 접어들어간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사람들의 텃세부림에 익숙해지고나니 나에게 보이는 건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의 사회에서의 나의 객관적인 위치다. 중국에서, 캐나다에서 만난 멋지고 사랑스러운 친구들의 품을 잠깐 벗어나면 느껴지는 건, 나는 이 곳에서 세금을 내는 시민도 아니고, 큰 사업을 하는 부자 외국인도 아니고, 심지어 유명 관광지에서 돈을 펑펑쓰며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관광객도 아닌 가난한 유학생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이 낯선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로 정의되는 사람이다.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을 쌓는 교환학생으로서의 시간과, 북미 사회에서 부유치 않은 젊은 동양계 유학생 여성으로 나 자신이 카테고리 지어지는 시간이 공존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에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 사회의 피라미드에서 나는, 타자에 의해 이해되어져야하고 혹은 존중받아야 하는 '약자'에 속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흥미롭게도 이 과정이 그동안 학습해서 이해해야 했던 약자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귀 기울이게 되는 동기가 되더라.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많이 진학한 초등학교의 전학율이 40%가 넘어갔다는 뉴스기사를 보았다. 엄마에게 제대로 못 배운 아이들과 어떻게 내 아이가 한 반이 되게 하겠냐는 학부모들의 댓글, 당신부터 그런 학교에 당신 아이를 보내보라는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린다. 아프리카계 사람들에 대한 비하발언을 서슴치 않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SNS에 화두가 된다. 이주 노동자, 새터민, 다문화가정, 그리고 한국 사회의 수 많은 이방인들의 억울함 서린 눈빛이 이제야 나한테 보이는듯 싶었다.


 나는 여기서 낯선 이들의 차가운 눈빛에 울다가도, 이렇게 추운 날씨는 처음일 텐데 오늘은 따뜻하게 입으라는 친구들의 전화에 웃는다. 한국사회의 이방인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앞으로 우리는 어떤 존재여야 할까.


우리 모두는 어디에선가는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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