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지식은 모두 틀렸으니까 지금까지 따르던 규칙은 모두 버려. 앞으로 언제나 통용될 규칙은 단 하나야. 내 말이 무조건 옳아. 시키는 대로 해.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마.
'더 레지던트'라는 메디컬 드라마를 보았다. 종합병원에서 일어나는 환자, 의사, 관리자들의 이야기다. 위 대사는 드라마 초입에 주인공 콘래드가 신입 인턴과의 첫 만남에서 하는 말이다. 곧이어 콘래드는 위기에 빠진 응급 환자를 멋지게 살려낸다. 역시 주인공은 다르다. 메디컬 드라마에서 자주 접하는 클리셰다. 외과의사 주인공이 주위의 구태의연한 의견을 뭉개고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와 압도적인 실력으로 도저히 가망 없는 환자의 목숨을 구해낸다. 시청자에게는 재미와 통쾌함을 선사한다. 일종의 히어로 물이다.
우리에게는 영웅이 필요하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와 나를 반대하는 저 방해꾼들을 한 방에 싹 처리해 주고 해피한 결말을 가져다줄 영웅이 절실하다. 일반 조직도 영웅적인 리더를 요구한다. 리더가 앞장서서 높은 전문성과 카리스마로 문제를 해결하고 성과를 창출하기를 기대한다.
외계인은 슈퍼맨이 막고, 도시의 악은 배트맨이 처리한다. 영웅이 군림하는 세상에서 일반인은 어떻게 살까? 초인이 만든 안녕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걸까? 언뜻 편하고 좋을 것 같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의 그늘은 구성원의 순종을 요구한다. 자율과 주도성을 반납하고 리더의 규율 안에서 리더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현실이 어떤가? 너무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어제의 상식이 오늘 폐기되고, 작년의 불법이 올해 합법화 된다.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내일이 펼쳐지고 있다. 한 개인이 통제하기 불가능할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무소불위 파워의 리더는 또 다른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의 경험과 관점이 필요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필 테틀록 교수는 정치, 경제, 언론 분야 전문가들의 예측을 분석한 결과, 그들의 적중률이 '다트를 던지는 원숭이'보다 나을 게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 훨씬 높은 예측 적중률을 보였다. 건강한 다수의 지성은 개인의 능력을 뛰어넘는다.
예측 불가능의 시대에 리더에게 더욱 중요한 능력은 집단의 지혜를 모으고, 구성원들이 자기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행동을 하기도 해야겠지만, 가능하면 말하기보다 듣고, 재촉하기보다 기다려서 구성원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드라마 더 레지던트의 주인공 콘래드는 지금도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환자를 돕고 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후배가 성장하도록 열심히 가르치기도 하고 다른 전문가들과 협업하여 어려운 수술을 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