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마음을 조심스레
두드리던 시절

삶의 길목에서 만난 노래 - 유리상자 '사랑해도 될까요'

by 작은노래


문이 열리고 머리가 약간 긴 남학생이 들어왔다. 진한 녹색의 점퍼를 입고 얼굴이 하얀, 그리고 몸이 가는 남학생이었다. 뺨이 쑥 들어갈 정도로 마른, 그래서 눈은 퀭할 절도로 커보였다. 그 남학생이 써클실(지금은 동아리방이라 부르지만) 의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뭔가가 쿵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스무살의 짝사랑은 시작되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미남도 아니었고, 나에게 말을 건 것도 아니었고, 그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다. 이름도 몰랐고, 학교도 몰랐고, 학년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그 남학생을 처음 본 순간 그냥 놀랍고 설렜다.


그 이후 나에게는 그 남학생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쌓여갔다. 어떤 책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 서클 멤버들의 의견이 팽팽하게 둘로 갈라졌다. 그것은 당시 사회를 어떻게 보느냐, 어느 정도 현실참여적이냐의 차이였다. 그 남학생은 예민한 양심을 지니고 있었다. 비판할 줄 알았고 괴로워할 줄 알고 있었다. 그의 순수한 양심의 목소리를 군대까지 갔다와서 현실을 안다는 4학년 선배가 비아냥거리듯 무참하게 묵살했다. 담배를 피우면서 선배의 의견을 반박하던 그 남학생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어느날 뒤적이던 회지에 실린 그의 시 역시 내게 찌릿한 감동을 주었다. 동물의 울음을 통해 현실을 풍자한 시였다. 폭넓은 생각과 재기 넘치는 표현이 마음을 끌었다.


그 남학생은 외국문학 전공의 2학년이었다. 신입생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내가 우연히 찾아간 문학 써클의 멤버였다. 몇 차례 써클 모임에 나갔지만 나는 그 남학생에게 한 마디 말도 걸지 못했다. 그리고 몇 번 모임 이후에는 아예 나가지 않았다. 써클의 선배들은 한창 비판의식이 불일 듯 일어나던 신입생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했고, 학교신문사 기자 생활도 바빠졌다. 그 남학생을 보기 위해서라도 모임에 나갔을 듯한데 그러질 못했다. 역시 젊음의 결벽증?


참으로 이상했다.

나는 길을 걷다가 흰 얼굴에 키가 큰 남자를 보면 그 남학생인 것 같아 깜짝 놀라 멈춰섰다. 밥을 먹다가 그 남학생 생각이 나면 목이 메이면서 밥 숟가락을 놓아야 했다. 짙은 녹색의 점퍼를 입은 사람이 보이면 후다닥 달려가 그 남학생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어느 날 나는 조심스럽게 그 남학생 앞으로 내가 쓴 글이 실린 학교신문을 보냈다. (학교와 과는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 사연도 쓰지 않았지만 내가 지닌 마음 한 자락이 그에게 전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뒤 편지가 왔다. 신문 한 장 달랑 보낸 것에 편지 답장이라니... 내 마음은 너무 두근거렸다. 편지 봉투를 뜯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뜻밖이었다고... 그런데 반가웠다고...내가 쓴 기사를 봤다고...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욕하며 술을 마셨다고...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누자고....


그리고 편지를 쓴 시간까지 적고 있었다. 새벽 1시도 넘은 깊은 밤중.... 난 그 시간에조차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나는 그 남학생의 과 주소 아닌 새로운 주소도 알게 되었다. 학교 기숙사 몇호!


분명히... 여학생의 마음을 전해 받은 남학생의 기쁨과 설레임이 담긴 편지였다. 난 몇 번이고,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가, 숨을 몰아쉬었다가, 어쩔 줄을 몰라 학교 교정을 막 달리다가 주저앉기도 했다.


답장을 썼다. 몇 번 종이를 찢어가며... 마음을 절제해가며. 그런데 웬일인가. 편지를 쓰면서 부끄러움이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자기 마음을 들켰다는 부끄러움이 자존심을 아프게 찌르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편지 첫 부분은 구태여 내가 별 뜻없이 신문을 보냈다는 변명까지 늘어놓고 있었다. 말하자면 "난 널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듯 여겨지는 편지를 쓰고 말았다.


편지를 보낸 직후부터 후회가 몰려왔다. 바보, 왜 그런 편지를 써. 자기 마음을 보여줘도 시원찮은데 그걸 부정하고. 넌 정말 바보다. 그애는 얼마나 기분 나쁠까. 어떻하지? 다시 편지를 보내? 다시 연락해?


모든 걱정은 다 쓸데없는 걱정이 되고 말았다. 편지를 보낸 직후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에는 휴교령이 떨어졌다. 100일이 넘는 휴교의 시작이었다. 그 남학생은 기숙사를 쫓기듯 나와 고향집으로 갔거나 하숙집을 찾았을 지 모를 일이다. 편지는 주인을 못 찾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100여 일 동안 기숙사 우편함에 꽂혀 있다가 그 남학생 손에 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편지를 받았을 때 그는 피식 웃고 말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오랜 휴교, 학생들의 시위, 광주민주화 항쟁…. 격랑의 역사 속에서 나의 짝사랑은 주소지를 찾지 못한 채 그대로 표류하다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유리상자 '사랑해도 될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0UrZroD7B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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