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만난 노래 - 이문세 '광화문 연가' , '엣사랑'
오랜만에 광화문 거리를 걸었다.
난 광화문에 있는 K여고에 다녔다. 10대 후반의 3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가슴 시리고, 작은 일 하나에 가슴 설레었고, 무언지 알 수 없는 야릇한 희망과 불안 속에서 지낸 시절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숱한 세월을 거슬러 그 시절로 가보았다. 내 맘을 설레게 했던 것이 왜 그리도 많았을까? 3층에 자리한 도서관에서 하나 둘 켜져 가는 서울의 등불을 바라보며 어두워가는 하늘이 서러웠던 까닭은 무엇일까? 왜 그리 주체 못할 그리움으로 어린 가슴은 터질 듯 했을까?
밤 10시가 넘어 집에 가는 버스를 탈 때면 늘 만나곤 했던 S고 어느 학생. 그 학생은 우리집 전 전 정류장에서 내렸다. 그애 집 쪽으로 가는 버스 노선은 단 하나였기에 도서관이 마치는 시간에 나오면 늘 그애를 만났다. 얼굴 한 번 자세히 본 적이 없었지만 난 버스 형광등 아래 그늘을 드리웠던 그애 눈썹 때문에 그 애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다만 눈썹의 그림자가 내 어린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한동안 내 그리움의 방향이 그 눈썹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다만 눈썹의 그림자였기에, 그리움은 또 그림자 스러지듯 스러져갔다.
그 즈음 나는 학교 선생님을 향해 그리움을 태웠다. 점심시간 뒤엔 입가에 고춧가루 하나쯤은 묻히고 들어오던, 어느 때인가는 짝짝이 양말을 신고 들어오던, 또 어느 날인가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먼 곳을 바라보던… 우락부락하게 생겨 고릴라같이 느껴지던 그 선생님 이름을 일기장에서 부르며 나는 또 한 차례 사춘기 열병을 앓았다.
십여 년 세월이 흘러 교사가 된 뒤 그 선생님을 우연히 어느 자리에선가 다시 만났을 때 그분은 내게 환멸을 불러일으켰다. 그때나 또 나중에나 개인적인 만남은 없었지만 그분이 선 자리는 제대로 된 교육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자리와 달랐다. 소녀 시절의 곱디고운 사연은 헛헛한 웃음 속에 사라져 갔다.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은 허상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허상, 실체 아닌 그림자를 사랑했기에 삶의 현장에서 다시 그 선생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존경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쬐끄맣고 볼품없던 소녀의 모습, 내 모습이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지닌 지적 허영심을 지적 우월감으로 생각하는 오만함을 지녔고, 한편으로는 천재도 영재도 아니라는 자각에, 빼어난 외모도 지니지 못했다는 생각에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예민하고 감성적이며 사춘기의 격랑에 흔들리던 소녀였다. 세상 모든 고민 짊어진 듯 생각 속에 빠져 살고, 누군가를 향한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다리가 아프도록 걷고 또 걷기도 했었다.
그러나 작은 몸집, 짧은 단발머리에 어린애 같은 얼굴…. 그 소녀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있다는 걸 누가 알기나 했을까? 사람들은, 특히 또래의 남학생은 성숙해가는 그 소녀에게 눈길 한 번 돌리는 것 같지 않았다.
나도 소설 속의 여주인공처럼 깊이 사랑해 줄 어떤 사람이 나타날까? 그 소녀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키 크고 잘 생긴 소년이 소녀에게 다가왔다. 시를 좋아하고 책을 즐겨 읽던 소년이 소녀에게 건네준 노트에는 숱한 그리움의 시들과 '그녀의 하얀 팔이 나의 수평선 전부였다'는 감각적인 시 구절이....그리고 그리움의 절창인 김소월의 [구름]이 담겨 있었다.
저기 저 구름을 잡아 타면....
붉게도 피로 물든 저 구름을
밤이면 새카만 저 구름을
잡아 타고 내 몸은 저 멀리로
구만 리 긴 하늘을 날아 건너
그대 잠든 품 속에 안기렸더니
애스러라, 그리는 못한대서.
그대여, 들으라 비가 되어
저 구름이 그대한테로 내리거든
생각하라, 밤 저녁 내 눈물을.
그러나 풋사랑으로 끝난 소년과의 만남. 나는 그 아이가 불편해졌고, 그 아이의 지나친 감성이 버거웠다. 나랑 같은 학교 다니던 자기 동네 선배에게 내 이야기를 해서, 나를 보러 오게 만든 것도 자존심 상했다. 나는 누가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에 우물우물 빵을 씹으며 교실밖을 나갔었더랬다. 남학생과 걷는 것만 눈에 띄어도 교무실로 불려가던 그때의 분위기 속에서 모범생이라는 내 지위가 흔들리는 것도 두려웠으리라. 그리고 세월은 그 모든 것을 하찮게 만들어버렸다.
아, 왜 많은 사랑과 꿈들이 환멸로 이어지는 것일까? 내가 마음에 고운 빛깔로 간직했던 사람들과 추억은 왜 빛바래는 것일까? 왜 어릴 적의 선연한 꿈은 그대로 지속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래, 그림자였기 때문인가? 그림자였기에?
그래,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두자. 그 그림자 역시 그리움이 아니던가.
나는 광화문 거리를 거닐며 내 소녀시절을 되돌아보며 자꾸만 노랫말을 외고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이문세 '광화문 연가' (2021 1월 놀면 뭐하니)
노래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JG2DqTNr4uA
이문세 '옛사랑'
노래 링크-https://www.youtube.com/watch?v=JG2DqTNr4u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