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기억 속에서 엄마는 3
"우리집에 신서방이라는 일꾼이 있었어."
"엄마 어릴 때?"
"응."
어느날 저녁밥을 먹다가 엄마가 80여 년 전쯤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의 기억은 과거로 갈수록 선명해지는 것 같다. 어제 일어난 일은 잊어버리시는데...
"신서방은 겨울이 지나고 날이 좀 풀리려고 하면 어딘가로 떠나."
"추수 끝나고 농한기에 안 떠나고?"
"그때는 너무 추우니까 못 떠나지. 근데 설 지나고 조금 날이 따뜻해지잖아. 그러면 떠나."
아마 2월쯤이겠지. 언 땅이 질쭉거리며 녹고, 아직 춥지만 바람에 봄기운이 실려오는 것 같은 그런 날, 입춘 언저리겠지?
"궤짝 같은 게 있거든. 떠날 때는 그 궤짝에 옷가지며 자기 짐들을 넣어서 메고 가는 거야."
고리짝이라는 걸 짋어지고 떠나는 모양이다.
"농한기에 잘 쉬어서 얼굴이 좋았었는데 한참 돌아다니다 초췌해져서 돌아와."
"그 사람 그때 나이가 어느 정도야? 색시는 없었어?"
나는 이것저것 궁금한 걸 묻는다.
신서방은 40 언저리의 노총각? 아니면 홀아비였나보다. 식구는 하나도 없었다. 홀홀단신이었다.
소한 대한도 지나고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풀리기 시작할 때, 그는 짐을 싸서 길을 떠난다. 방랑의 길을. 헤어진 옛 연인을 찾으러 가는 것일까? 두고온 고향집을 찾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남아 있는 젊음의 열기를 식혀보고자 방랑하는 것일까?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헤매는 것일까? 파종에서 추수까지 지루하고 힘든 노역의 날들을 보상하려는 자기만의 여행이었을까?
한참을 돌아다니던 신서방은 일손이 필요할 때쯤 다시 돌아온다. 추수 끝나고 받았던 품삯도 떨어졌으리라.
"신서방이 돌아오면 아이들이 막 외치는 거야.
'신서방 왔다~!
마을 남자들은 저녁 먹고 아랫사랑채에 모여들지. 신서방한테 이야기좀 들으려고. 나는 거기 끼진 못했어."
집에 돌아올 때면 신서방은 뭔가 사 와서, 어린 시절의 엄마에게 주었다.
"바람개비를 사다 줬어.그거 들고 막 달려 봤지."
어린 엄마는 묻는다.
'신서방, 어디 갔다 왔어?'
신서방은 약간 쓸쓸한 미소를 띠고 대답한다.
'그냥 돌아다녔어.'"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가 알던 어느 소년의 엄마를 떠올렸다. 남편도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던 그 여자는 젊고 아름다웠다. 모자는 어느 교회의 도움으로 교회 사택 방 한칸에 아들과 함께 얹혀 살았다. 아이는 똘망똘망하고 잘 생겼으며 공부도 잘 했다. 그러나 눈빛은 웬지 슬프고 때로는 날카로웠다. 누군가에게 들었다. 아이 엄마는 봄바람이 불면 집을 나간다고, 아이도 두고 혼자 나간다고. 그동안 아이는 교회 목사님이 거둬주신다고 했다. 봄꽃이 질 무렵, 아이 엄마는 돌아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피식 웃으며 '아이 엄마가 그 무슨 봄바람이야. 애 생각을 해야지.'라고 말했던 것 같다. 여자가 느끼는 그 공허함, 그리움, 애절함, 슬픔, 번민..... 숱한 감정들이 뒤범벅된 마음을 나는 헤아리지도 못했던 것 같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흐린 기억 속에서 엄마가 신서방을 기억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고리짝 메고 떠나 지향없이 방랑하던, 그의 쓸쓸한 마음 한 자락이 어린 엄마 마음 속에 느껴졌기 때문일까? 그가 안고 있는 아픔과 슬픔, 그리움과 갈망... 신서방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한! 그 한 줄기를 느꼈기 때문일까?
나는 지치도록 방황하다 일터로 돌아오는 한 남자, 그 남자의 손에 들린 바람개비를 생각한다.
바람을 맞으면 한없이 돌아가는 바람개비!
그 바람개비를 받고 그의 방랑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뭔가 연민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는 어린 여자애의 모습을 떠올린다.
신씨 아저씨가 가져온 바람개비를 바라보는 어릴 적의 엄마 모습을 상상해서 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