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남매 분투기

흐린 기억 속에서 엄마는 2

by 작은노래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그후.


병원에서 두달 여 시간이 흘렀다.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일반 병실로, 그리고 무빙워커 잡고 조금 걷기까지 되었다. 병원에서는 퇴원하라고 했다. 재활병원을 가시든지, 요양병원을 가시든지... 아무튼 병원에서는 퇴원해야 한다고 했다.

어찌 해야 하나? 우리 4남매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 엄마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지도 몰랐고, 그런 일이 생기면 그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도 나눈 적이 없었다.

재활병원? 어떤 재활을 얼만큼 더 해야 하는 거지? 조금씩조금씩 나아가시는 데 재활병원이나 요양병원에 가시는 게 도움이 되나? 퇴원해서 집으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

집? 어느 집으로?


혈관성 치매라는 병명을 달고 있는 엄마, 누군가 옆에서 부축해야 하는 엄마. 화장실 출입도 힘든 엄마

어찌 해야 하나? 당장 어찌해야 하나? 다들 자기 하는 일들이 있는데 누가 엄마를 돌본단 말인가?


언니는 몸이 불편한 형부를 수발해야 한다. 자기가 모실 수 있다고 했지만 환자 두 명을 수발한다고? 안될 말이다. 다른 형제들은? 다 자기 생업에 바쁘다.


농사짓는 막내동생이 우선 엄마를 몇 달 모시겠노라고 했다. 그 몇달 뒤면 방학이니 내가 또 잠시 엄마를 모시겠다로 했다. 그러는 동안 엄마와 함께 살던 큰동생은 이사를 하고 엄마 모실 준비를 하겠노라고 했다. 요양보호사도 와야 하고, 집에 안전 장치도 설치해야 하고... 무엇보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했다.


시골 동생집에서 두어달. 엄마는 많이 좋아지셨다. 그러나 마음은 늘 큰아들집이었다.

그 다음, 우리집에 오셨다. 코로나 때라 데이케어 센터에도 가실 수 없어 한 달을 엄마와 꼭 붙어지냈다. 내가 일이 있을 때는 언니가 또 엄마와 지냈다.

얼마 뒤 큰동생이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 방에 안전바를 설치하고, 요양보호사도 구하고, 낮에 다니실 데이케어 센터도 알아보았다.

큰동생 집, 방학에 잠깐 우리집, 겨울이면 농한기 동생집..그렇게 1년 반을 보냈다.


서로가 다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밤에 엄마 옆에서 자려면 몇 차례 깨야 한다. 그런 상태로 직장에 나가 몽롱한 상태로 일을 한다. 오전 9시쯤이면 데이케어에 가셨다가 오후 4시반이면 돌아오신다. 그 7~8시간이 온전히 내 시간이 될 수는 없다. 뭔가를 하다가도 마음이 조급해지고, 이러저런 준비를 해야한다. 목욕은 물론 배변 처리까지 도와드려야 한다. 조금씩 무너져가는 엄마를 지켜보는 일도 마음이 무겁다.

며느리들은 또 무슨 죄인가? 자식들이야 엄마가 낳고, 길러주었다. 자식들은 은혜를 입었다. 사랑을 받으며 컸다. 근데 며느리들은?


큰올케는 수십년 엄마와 살았다. 얼마나 부자유하고, 불편했을까? 그러다가 치매 수발까지? 피곤한 동생과 교대하여 엄마랑 자던 어느 날, 큰올케는 엄마를 부축하다 같이 미끌어졌다. 엄마를 일으키지 못해 올케는 한참을 쩔쩔맸다고 한다. 2층에서 자던 동생은 잠에 취해 벨 소리도 못듣고... 상상만 해도 진땀이 난다.


홍천 사는 둘째 올케는 엄마가 가 계시던 때에 한 번은 대상포진으로, 한 번은 골절로 고생했다. 한 두달 계실터이니 요양보호사도 못 구하고, 농사에, 집안 살림에 쩔쩔 맨 듯하다.


엄마를 돌보는 동안 모두 제한된 생활을 해야했다.


내가 좀 더 나서야 했다. 월화수목 큰동생집, 금토일 우리집에 계시기로 했다. 금요일 퇴근하면 데이케어에서 오시는 엄마를 맞이했다. 월요일엔 내가 출근을 하니까 언니가 일요일 저녁에 우리집에 와서 엄마를 모시고 자고, 월요일 아침에 엄마를 데이케어에 보내드리고 갔다.

나는 금토일 휴일이 없었다. 주말의 휴일이 없는 생활 몇달.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 뒤 나는 퇴직을 해버렸다.


엄마에겐 안정이 필요했다. 자꾸 바뀌는 생활 공간은 엄마 마음을 더 어수선하게 만들 거 같았다. 우리는 다시 모여 의논을 해야했다.

엄마 집을 구하기로 했다. 엄마가 한 곳에 계셔야 안정감을 갖고 적응해 가실 수 있고, 우리 넷이 다 엄마를 돌보려면 엄마가 독립된 공간에 계셔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건강과 하는 일 등을 계속 해나가려면 밤에도 엄마를 돌봐줄 요양보호사를 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집이 가까우니 아침 저녁 엄마를 돌보고, 큰동생과 언니는 1주일에 한 번씩 오기로 했다. 주말에는 돌아가면서 엄마랑 잔다. 홍천 사는 동생은 격주 주말마다 와서 1박2일을 하기로.


생활비, 요양보호비, 데이케어 센터 비용... 만만치 않은 비용이다. 각자의 형편에 맞게 내기로 했다. (큰동생이 너무 많은 비용을 내는 게 미안하다.)


이렇게 해서 4년째가 되어간다.


신문 방송에 등장하는 효자 효녀들을 보면 우리 상황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염치 없다.

어려운 형편에 부모님 모시느라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엄마는 그래도 건강하시다. 식사도 잘 하신다. 누구에게 거친 언사 한 번 안 하신다. 아직 곱디 고우시다. 그러니 힘들다고 말하는 게 꺼려진다.


쉽지는 않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보자고 오늘도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고군분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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