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행과 인간의 내면을 담은 작품과의 콜라보
엄마, 내가 갑자기 바퀴벌레가 된다면, 어떻게 할거야?
이전에 SNS에서 일명 바퀴벌레 밈이 유행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자신이 하루아침에 바퀴벌레가 되어버린다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자 ‘바퀴벌레 설문’을 해보는 유행이었죠. 한편, 이 질문놀이는 독일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하게 합니다. 카프카의 <변신>에 대해서 현재까지도 인간의 입체적인 내면과 관련해 수많은 분석이 주장되고 있는데요, 인간이 한 마리의 갑충으로 변신하는 소재 자체만으로 우리 안의 다양한 생각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볍게만 지나갈 수 있었던 바퀴벌레 질문을 통해서도 잠시 여러가지의 감정과 생각에 머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카프카의 작품과 함께 단순했던 질문 놀이를 깊은 내면의 고찰로 나아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쎄한 꿈을 꾼 주인공 그레고르는 아침에 눈을 뜨자, 악몽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이 거대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모습이었죠. 가족들은 벌레가 그레고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원래 외판원으로서 일을하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책임지는 그레고르였죠. 하지만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은 눈 앞에 있는 혐오스러운 벌레 탓에 본래 그레고르를 대하듯 보살펴주지 못합니다. 그저 방 안에 가둬놓고 눈에 띄지 못하게 하며, 먹이를 던져줄 뿐입니다. 그레고르도 가족에게 민폐가 될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살고,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결국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은 상처로 인해서 혼자 방안에서 죽습니다. 죽은 후에도 그는 인간으로서가 아닌 벌레로서 버림을 받고 가족들은 해방된 자유를 누립니다.
바퀴벌레 밈을 마주했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에이, 그래도 가족인데 어떻게 죽여버려’라는 생각을 하셨나요? 우리는 그저 상상만 했을 뿐 그레고르의 가족들처럼 실제 상황이 아니기에 바퀴벌레가 된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고 동정심이 작동하게 됩니다. <변신> 또한 그레고르의 고독함이 더욱 극대화되어, 독자들은 주인공의 가족을 비난하고 비판할 수도 있죠. 하지만 주인공이 변신한 벌레의 모습을 직접 눈앞에 두면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레고르의 가족이 소중했던 주인공을 한순간에 회피할 만큼 엄청난 혐오감과 징그러움이 눈에 한가득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 강조된다면 말입니다. 실제로 카프카는 일부로 변신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으며, 출판 당시 벌레를 그리지 말아달라고 당부했습니다. Ungeziefer라는 해충의 강조된 표현만 사용할 뿐입니다. 독자가 어떤 해충의 모습을 상상하느냐에 따라 주인공의 편이 될 수도, 가족의 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 부분에서 입체적이고 솔직한 인간을 직면할 수 있고, 그 모습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자신의 모습이 될 수도 있죠.
<변신>은 쓸모 없어진 그레고르가 가족에게 버림을 받는 순간들로 온통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바퀴벌레 질문도 버림을 당할 수 있다는 약간의 두려움이 한편으로는 작용된 것이죠.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쓸모있는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순수했던 시절과 다르게 훨씬 계산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과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남은 인생을 더욱 알차게 살 수 있는 방법이죠. 하지만 쓸모있는 사람만을 추구하다보면 결국 자신의 주변에 남는 사람이 없어지는 순간이 생기게 됩니다. 자신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게 되지요. 자신을 쓸모없고 민폐덩어리라고 생각하는 그레고르처럼 말이죠. 그리고 역으로 무쓸모해진 그레고르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가게 됩니다. 필요성의 유무로 각자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은 카프카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매우 입체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직면한 상황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간적일 수도 때론 비인간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고, 효율적이거나, 헌신적일 수도 있습니다. <변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여러분은 어떤 모습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