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국가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영화는 알 수 없는 병이 한 집안에서 대물림되며 시작한다. 대물림을 막기 위해 장손은 무당을 찾는다. 무당 김고은, 이도현은 병의 화근이 조상의 묫자리임을 알아채고, 풍수사, 장의사와 함께 무덤을 파헤친다.
무당, 묘, 알 수 없는 병. 영화 <파묘>를 설명하는 키워드들은 일반적인 오컬트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묫자리를 파헤치며 우리가 만나게 될 서사는 단순한 심령물보다 훨씬 심오하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옛이야기, 아픈 역사에 대한 파묘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여우가 호랑이의 허리를 끊었다’
그들이 정말 파묘를 하고 싶은 건 ‘험한 것’이다. 땅에 박혀있는 ‘험한 것’은 백두대간 척추에 꽂혀있다. 바로 조상의 묫자리가 조선의 정기가 모이는 척추, 곧 허리였던 것. ‘험한 것’을 그대로 땅에 두면, 장손의 가문은 물론 조선 땅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을 빼내야만 온전히 우리의 땅, 우리의 척추를 정상적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파묘를 방해하는데, 방해꾼의 정체는 일제 쇼군의 모습을 한 도깨비. 도깨비는 매우 악랄하다. 아니 악랄함을 넘어 야만적이다. 자신의 부하가 아니라면, 머리를 잡아 떼거나, 간을 빼낸다. 말도 안되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도깨비에게 김고은은 몸을 숙여 복종한다. 나머지 일당도 무력해질 뿐이었다.
그런 인간의 모습에 도깨비는 쾌락을 느낀다. 마치 힘이 없는 식민지를 정복하고 백성들의 비참한 굴복을 원하는 모습처럼. 야만적인 도깨비는 조선의 척추를 탐낸다. 약한 인간을 학대하고 그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곧 훈장이다. 야만적인 욕망과 정복욕은 도깨비를 땅에 오랜기간 박혀있도록 한다. 우리의 땅은 그렇게 죽어간다.
영화의 포인트인 ‘험한 것’은 일제의 쇠말뚝 박기를 모티브로 한다. 일제는 우리 민족 정기를 말살시키기 위해 혈자리를 찾아 쇠말뚝을 박았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민족의 혈이 모이는 지점을 찾아 통로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다. 일제의 풍수침략은 조선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영화에서는 ‘험한 것’을 빼내고자 파묘를 수행하지만, 아직 우리의 마음에는 해결되지 않은 아픔들이 깊이 박혀있다. 자신들의 과오를 외면하며 반성하지 않는 자들은 여전히 쇠말뚝으로 남아있는 채로.
기억하기 위해 박혀진 쇳덩이
영화 속 장손의 경례 장면은 ‘Heil Hitler!’라는 구호와 함께 특정 국가를 연상케한다. 식민지배 국가, 독일이다. 앞을 향해 들어올리는 팔은 ‘위대한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경의를 표한다. 제국주의의 세뇌 의식과 같은 것이다. 나치즘의 상징성을 지닌 의식이기도 하다. 그렇게 뜨거운 칭송을 받았던 나치, 그들의 행복도 누군가의 피눈물로 이루어졌으며 역사에 ‘험한 것’으로 고착되어있다.
베를린의 길을 거닐 때 발이 무언가에 걸리곤 한다. 바닥을 보니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박혀져있다. ‘000가 이곳에 살았다. 0000년 생이며 0000년에 추방됨.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함’.
나치의 만행으로 희생 당했던 자들의 정보가 새겨져있다. 이 동판의 정체는 ‘슈톨퍼슈타인’. 잔혹하게 고통받은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동판이다. 동판들은 멋들어진 곳에 박혀있지 않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보도블럭, 건물, 기차 승강장. 사람들의 삶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사람들의 발을 건드린다. 무심코 흘러가는 일상 속에 희생자들을 기억해달라는 듯이.
나치에 대한 반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브란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만나볼 수 있는 홀로코스크 메모리얼에는 슈톨퍼슈타인처럼 수많은 비석들이 박혀져있다. 위아래로 굴곡이 나있는 평평하지 않은 바닥에 가득 채워진 검고 사각진 추모비들. 비석의 사잇길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비석의 높이는 점점 하늘을 찌른다. 밝지 않은 분위기에 세워진 높은 비석 사이에 서있으면, 아무도 없는 검은 숲에 들어온 듯한 두려움에 휩싸인다. 동시에 숨이 막히는 느낌도 든다. 홀로코스트로 희생당한 유대인의 막막함과 두려움을 생생히 느끼도록 설계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이곳에 방문한다면 그 묘한 공포감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김고은이 도깨비를 마주쳤을 때 엄습한 두려움과 사뭇 다른 감정이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당시에 느꼈을 감정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도록 해준다. 오로지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는 독일의 심장과 같은 베를린에 가득 세워져있다.
<파묘>는 여전히 우리에게 비통함으로 남아있는 사실들을 다시 상기시킨다. 고질병으로 남아있던 ‘험한 것’을 이제는 파헤쳐서 허물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손에 박힌 가시를 그대로 방치해두면 살이 그 위를 덮는다. 당분간은 덮인 살 덕분에 따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지언정 안에 박혀있는 가시는 또 다른 균을 만들어내거나, 안에 상처를 곪게 만든다. 당장 편하자고 가만히 두었다가는 더 큰 병으로 괴로워질 수 있다. 순간적으로 큰 아픔이 다가올테지만, 나중을 위해 그 아픔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험한 것’을 마주하는 것이 아프다. 아프고 괴롭다. 하지만 계속해서 꺼내보아야한다. 적어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상대가 회피하려고 한다 해서 우리 마저 회피해서는 안된다. 아픔에 무뎌지고 있는 우리의 일상이 그들이 원하는 그림이며, 우리는 계속 약자로 남는다. 가시같은 것을 빼내야 비로소 더 강한 우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