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인문극장 2025 : 지역 LOCAL
Ringing Saga
무언가 울려 퍼지고 있는 생동의 상태인 ‘링잉(Ringing)’, 장대한 서사 혹은 모험담을 의미하는 ‘사가(Saga)’를 합친 합성어 '링잉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표현이었습니다. 생동감이 넘치는 하나의 서사, 혹은 누군가의 모험담을 담는 듯한 대략적인 느낌으로만 와닿고,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섯 명의 작가들의 종로에 대한 시선이 담긴 특별전을 보기 전까지는요.
두산아트센터에서 현재 진행 중인 특별 전시 <Ringing Saga>는 종로를 주제로, 종로에서 감각한 익숙하고 낯선 것들을 새로운 모험담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꽤나 흥미가 있던 주제였습니다. 스무 살 이후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면서 내외적으로 가장 역동적이고, 더 나아가 이국적이기까지도 했던 동네가 종로였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종로는 알다가도, 알기 어려운 동네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그리고 일상적으로도 우리 고유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왠지 모를 이질감이 올라오곤 하니까요. 이러한 낯선 이의 시선, 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만, 이번 특별전에서 그들의 발걸음에 깊은 공감과 신선한 이질감을 마주해 보았습니다. 각자만의 종로를 사유하는 방식을 체험하며, 마침내 링잉 사가가 저에게도 울리고 있었습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거닐어보는 누군가의 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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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전시를 돌아다닐 때면, 작가의 의도를 찾고자 무의식적으로 작품보다 해설지에 더 몰두하며 나름의 해석을 부여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인위적인 노력을 애써하지 않았습니다. 해설지에서 최대한 거리를 두며 천천히 작품 한 구석, 한 구석을 살펴보고자 했고, 그렇게 하니 서서히 전시에 스며들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눈에 띄었던 작품은 이유성 작가의 작품이었습니다. 보자마자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밤거리와,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인 재건축 거리가 연상되며, 익숙하면서도 낯섦이 동시에 와닿았습니다. 어디선가 둘러본 것만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그 풍경이 그저 편안하지는 않았습니다. 약간의 혼란스러움과 어렴풋이 느껴졌던 정겨움이 뒤죽박죽 섞인 채 종로의 첫인상을 남겼던 순간이 떠올라서일까요.
이 작품에서 네온사인과 거친 황동판 다음으로 눈에 띄었던 부분은 장미였습니다. '장미를 왜 두었을까.' 전시 해설에서 장미를 '인류사 전반에 걸쳐 복합적인 문화적 기호로 작동해 온 식물' 설명한 점을 보며, 나름대로 이해를 했습니다. '복합적인 문화적 기호'의 의미가 다소 어렵게 느껴지지만, 아마 종로의 전반적인 인상들, 작가가 종로를 거닐며 지녀왔던 생각과 느낌, 감정, 외적인 부분들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탄생한 장미가 아닐까요. 작가가 받아들였던 종로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들은 저만의 종로에 대한 복합적인 기억과 그 속에 담긴 감정을 다시금 건드려줬다는 점에서 이 장미를 통해 작가와 잠시나마 연결되도록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유성 작가의 작품 뒤에는 특정 인물들의 사진이 길게 늘어져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들을 보자마자 실존하는 사람인가 싶다가도,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실제로 실종알림이 떴던 분들의 정보가 적혀있어서 더욱 이질감이 느껴졌습니다.
이 인물들은 구동희 작가가 모두 실종 알림에 떴던 사람들을 ai로 구현한 인물들입니다. 보면서 상당히 이상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실종된 사람들을 이렇게 보게 됐다는 점에서 1차적인 씁쓸함, 그리고 ai이기에 작품 속에서 비친 모습들이 현존하지 않을 수 있다는 2차적인 괴리감, 보면 볼수록 인간이 아닌, ai 특유의 생김새가 또렷하게 보여 3차적으로는 이물감이 마음을 감 싸돌았습니다.
ai와 인간, 그리고 실존하는 우리 지역과 ai가 만들어낸 지역 사이에서의 거리감이 한 프레임 안에 녹아든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모험 속에서 느낄만한 익숙함과 낯섦이 오고 가는 그 감정을 잘 표현해 낸 작품이기에, 이번 특별전의 취지에 걸맞은 작품이었습니다.
다음 작품을 위한 발걸음을 옮기며 한 여성의 영상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광화문 거리와 효자동 사거리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여성. 이 여성은 길바닥에 눕기도, 지나가는 행인을 가로막으며 그녀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잔잔했던 일상이 누군가의 움직임으로 단번에 정치적인 순간으로 전환되는 분위기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영상을 보며 1호선이 생각이 나기도 했습니다. do 에디터의 서막을 알렸던 글에서도 언급했었지만, 항상 종로를 지나갈 때면, 지하철의 분위기가 전역들에 정착했을 때와는 달라지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어르신들의 마실과, 장보기, 당신들의 이야기 소리에 지하철의 정적은 온데간데 사라집니다. 가끔은 답답함에 하소연을 하고 싶으신 분들과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시는 분들, 독특한 개성으로 특정한 행위를 하시는 분들이 동승하면서 특별한 경험을 겪기도 하죠. 종로에 대한 인상은 지하철에서도 쌓여갔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어느 날이 전동차의 문 닫힘으로 특별하게 물들어가는 지점. 그 지점이 제게는 종로였습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주는 존재랄까요.
과거에는 이런 종로에 대한 경험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지만, 두산아트센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종로의 존재가 특별해진 듯합니다. 영상의 시간이 이곳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맡아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푸르게 벽면을 가득 메운 김보경 작가의 작품입니다. 멀리서 보면 푸른 인상이 세게 남지만, 가까이서 보면 푸른 배경에 담긴 갖가지 요소들이 제법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조선시대의 청자 문양을 따라 이어지는 꽃과 역사, 그리고 종로로 보이는 사진까지. 마치 종로의 타임라인을 보는 듯합니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종로에 대한 기억 같기도 합니다. 문양이 길게 늘어선 모습이 해체적인 형태로 보이면서도, 여러 요소들이 문양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총체를 이룹니다. 문양과 사진의 콜라주가 이질감이 들지만, 어색하지 않은 조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벽화 앞에 놓인 이유성 작가의 작품으로 종로의 복합성이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김보경 작가의 벽화 덕분인지, 문양이 늘어선 것처럼 저의 의식도 자연스러운 흐름대로 종로를 향해갔고, 전시를 둘러보는 발걸음도 의식이 따르는 대로 흘러가며 전시를 즐기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감상한 작품은 안진선 작가의 작품이었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트리스, 건축 자재들이 전시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모습이 신선해 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게 큰 울림이 되기도 한 작품들입니다. 사실상 이 작품들은 전시장에 놓이기 전까지 일상에 버려진 사물에 그쳤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사물들에 작가의 특별한 손길이나, 인위적인 무언가가 행해지지 않아 보였고, 사물 그대로가 전시물 행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시장이라는 공간으로 인해 가치가 재구성된 이들. 무언가의 존재라는 것이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치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묘한 감정을 일게 합니다.
그저 쓰임이 다한 매트리스, 건축 자재에 불과했던 이들이 누군가에게 의미를 전해줄 가치로 변화한 순간을 바라보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의 관계성을 되짚어보기도 했습니다.
타 전시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생각을 내려놓으며 즐겼던 <Ringing Saga> 전시. 단순하고도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기에 전시장에 깃든 여러 고찰과 감정, 사유들이 저에게 스며들 수 있었습니다. 또, 공감과 낯섦, 이질감과 기시감으로 다섯 작가들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종로'라는 교차점에서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전시는 종로를 꼽았지만, 지역이라는 존재성을 감각해 보는 시간이었달까요. 지역이란 공간적 의미 이상으로 어쩌면 '나'를 매 순간 재구성해주는 존재임을 깊이 느껴봅니다. '나의 지역이란 어느 곳이었는지, 그리고 오늘의 지역은 어느 곳인지', 스쳐 지나가기 바빴던 종로 길가에 누군가가 예쁘게 매듭진 리본이 잠시 멈춰 세우며 오늘의 지역을 느끼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