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인문극장 2025 : 지역 LOCAL
유럽은 개인주의, 우리나라는 집단주의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을 알아가면서 느끼는 점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건 유럽의 개인주의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진정한 개인주의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더군요. 어릴 땐 개인주의가 남에게 관심이 없는 성향, 혼자서 살아가려는 성향으로 알고 있었는데, 독일을 이리저리 경험하고 난 뒤에는 그들의 개인주의가 그런 성향과는 다름을 느꼈습니다. 학생들에게 문화, 교통, 교육 등 다양한 혜택이 주어지고, 파업이 일상이고, 토론을 좋아하고, 방과 후에 개인시간을 충분히 갖는 그들의 삶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올 부분들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의 삶에 관심이 깊기에 가능하 것들이죠. 그렇다면 개인주의라는 표현은 어떤 부분에서 등장한 것일까요?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자면, 그들의 개인주의는 개개인의 목소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조직적인 목소리에 묻힐 수도 있는 개인들의 소리에 경청하고, 각각의 개체를 개인으로서 존중하고, 하향식 의사결정보다 상향식 의사결정을 택하며 권리를 보호하도록 하죠. 제가 독일에서 살 때, 독일은 좀 차갑다고 느낀 것도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들은 제가 입을 열려고 하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눈을 오로지 저에게 집중시키면서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려 했습니다. 입을 열지 않으면 그냥 같이 사는 아시아인으로 여기듯 딱히 특별한 관심을 주진 않고요. 이외의 라이프스타일들은 자세히 모르겠지만 이주민으로서 느낀 독일인들은 '먼저 목소리를 내면 굉장히 집중해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타인에 관심이 많고 서로에 대한 존중이 뛰어난 나라지만요, 가끔은 다수의 목소리가 커서, 혹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서 개개인의 목소리가 묻히는 순간이 씁쓸하게 다가오곤 합니다.
이번 do 에디터로 참여한 네 번째 강연은 그 씁쓸함이 더욱 크게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서울 공화국이냐 균형발전이냐
6월 27일, 두산아트센터에서 이정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의 강연이 열렸습니다. 이전 양승훈 교수의 강연과 비슷한 맥락으로 수도권 집중현상과 지역균형발전을 집중적으로 다룬 강연이었습니다. 특히 수도권의 범위를 더 좁혀 수도권 인구조차도 서울로 향하는 현상을 꼬집습니다.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고 현상은 현재에만 존재하는 현상은 아닙니다. 과거 오랜 시간 동안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사회적 산물입니다.
서울에 몸과 마음이 쏠리는 이유.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대한민국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봅니다. 한 나라의 문화를 보다 실감 나게 느껴보려면 기행문이나 해당 나라에서 먹고살았던 사람의 일지, 전기를 훑어보는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가장 적나라하면서, 작위적이지 않아 더욱 사실적이죠. 이정우 교수 또한 당시 우리나라의 모습을 전해줄 두 편의 저술서와 함께 설명을 뒷받침했습니다. 하나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지리학자이자 다양한 국가의 여행기를 기록한 여행작가인 Isabella Bird Bishop의 <Korea And Her Neighbors>를 소개했는데, 이 책에는 그녀가 조선 지방을 돌아다닌 여정과 연해주를 방문한 경험이 담겨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전 미국 대사관 외교관이었던 Gregory Henderson이 집필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로, 해방 이후 정부수립부터 정치적 격동이 몰아쳤던 시기에 그가 한국정치에 참여관찰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두 집필서의 공통점은 한반도의 정치는 모두 서울에서 나오고 서울로 향하기 때문에, 지방의 정치는 거의 부재한 수준에 머묾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자벨라 버드 비숍의 경우, 조선인에 경멸감을 느낄 정도로 지방 관아를 돌아다니며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지방 관아 사람들이 노름판에 놀아나고, 나랏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도, 성실하지도 않아 게으른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조선인을 혐오할 정도였던 그녀에게 마음이 뒤바뀌게 되는 일이 나타나는데요, 경멸감에서 찬탄으로 바뀌는 계기는 바로 연해주 방문이었습니다. 그곳에 가니 가장 부지런하고, 제일 잘 살았던 민족이 조선인임을 알고 인식이 뒤바뀌게 되었죠. '같은 조선인인데, 왜 그리 딴판이었을까.'. 당시 양반들의 횡포 정도가 극심하고 나라의 착취로 인해 고혈을 다 빨린 백성들이 지방으로 피신해 사람답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간 것이었습니다. 연해주에는 양반이 없다는 이유로 삶이 완전히 달랐죠.
원님, 군수들이 죄다 서울에 가 있고, 지방에는 나라에서 몰려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그 간극을 줄이기엔 가혹했습니다. 지방에 부임을 하더라도 잔칫상에서 뇌물을 받고, 서울 가서 세도가에 가서 뇌물을 다 가져다 받치며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바둥바둥할 뿐이었습니다. 지방은 피폐하고 결정권은 다 서울이 쥐고 있는 모습은 이미 역사 깊은 악순환입니다.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방의 행정은 중앙 행정의 입김에 이리저리 흔들리죠. 한국은 항상 서울만 있고, 지방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중간 매개 집단이 없어서 승자독식의 세계가 바로 한국임을 이정우 교수는 이야기합니다.
균형발전을 위해
죽은 지방을 다시 살리는 것. 이를 위해 어떤 정치가 이뤄져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한국이 나아가야 하는지 이번 강연은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줍니다.
1) 민간에게는 혁신클라스터 주도권을, 정부는 민간을 모으는 촉매자, 중매자로. 2) 전통산업, 기초기술, R&D 기술에 더 나은 투자를 할 것. 3) 지역혁신체제를 위해 지방에 권력을 분배시킬 것.
강연을 함께 듣는 분들의 생각은 어떠실지,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켜보는 분들의 생각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국가가 주도하는 집단적 움직임이 아닌, 개인의 움직임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차원에서 말이죠. 우리나라는 많은 현상들을 덩어리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짙은 것 같습니다. '서양이라 그런 거 아닐까.', '서울이라 그런 거 아닐까.', '지방이라 그런 거 아닐까.'. 사회 현상은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복합적인 목소리가 얽히고설켜서 등장하는 일들인데, 우리는 그저 보이는 것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정작 목소리 주체의 진짜 목소리는 듣지 않으려 합니다. 민간 주도 사업을 한다 하더라도 민간이라 힘이 없으니까, 정부가 간섭하는 게 당연하고 R&D사업이나 기초, 전통산업보다 서양에서 훨씬 우월한 기술을 선보이니 그들만 좇으려 하고, 지방에 인구를 늘린다고 해서 아파트 재건축만 시행하고 실질적인 권력은 분배하질 않습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으로 현재 우리나라는 불평등 최다보유국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별, 권력, 학력, 소득, 노동 모든 부분들에서요. 강연의 이야기처럼 중간집단이 소멸해 버렸습니다. 중간을 위해 일반화되고 단편적인 대책은 멈춰야 하지 않을까요.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도록요. 지방의 존엄을 위한 집단주의와 한국을 위한 개인주의 두 지점의 균형을 이뤄내는 것, 그것이 균형발전을 위한 첫걸음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