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인문극장 2025 : 지역 LOCAL
저에게 서울은요!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저는 수도권 사람이라는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에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에요. 서울 토박이는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서울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살아왔고 마침내 그 꿈이 이뤄졌으니, 성취감과 뿌듯함이 자랑스럽게 다가왔습니다. 비록 좁은 방과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통장, 불완전한 독립이라는 태그를 떨치지 못했지만요.
그러나 이런 자부심이 순수히 동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 혹여나 자랑스러움을 빙자한 자만함이 내 자신을 속여왔던 게 아니었을지. 6월 16일, 이 날 열린 양승훈 교수의 강연이 지금까지 서울로 향했던 제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 '수도권 집중 현상 언제까지....', ' 청년에게 묻는 지방소멸'. 수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촌향도 현상은 점차 짙어지고, 덩달아 지방소멸의 문제도 심각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지방에서 살지 않으려 한다는 얘기는 꽤 오래전부터 서서히 들리던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온갖 로컬 마케팅이 시도되고 있는 걸 보면, 현실의 심각성이 피부로 와닿습니다. 청년을 지방에 붙들고 있을 방법은 정말 없을까요? 그것보다, 청년의 마음을 사기만 한다면 해결되긴 할까요? 이 고질병을 낫게할 처방은 도대체 어떤걸까요.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 상황에 대해 수도권 집중 현상, 지방 소멸과 같은 고정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야함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뉴스 보다 뉴스 외의 것들, 즉 인구 이동 문제에 가려져있던 지방 청년들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전합니다.
청년이 어떤 고정된 위치나 역량이나 활동에 대해 규정되지 말아야한다.
'지방 청년'을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발화 주체에 따라서 지방 청년을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 양승훈 교수는 세가지로 정리합니다. 1) 대학 서열화 체제의 희생자, 생존자 2) 사회적 공정이나 자신을 인생의 1순위로 두는 '수도권의 주체성'과는 거리가 먼 겸연쩍은 주체 3) 숨어있는 지역을 개척해나가며 지방을 살려나가려는 능동적인 주체
사실, 살아오면서 지방을 차별하거나 열위로 취급하는 등 위계적인 태도를 취한적은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지방을 편견으로 바라보고 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애초에 서울시민으로의 동경심과 자랑스러움 자체가 중심-주변 가르기, 이원화적 사고에서 흘러나온 마음이더군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방과 수도권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해온 것,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학 서열화나 일자리 시장, 온갖 사회 장치들이 파생된 것.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지적한 논의점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들은 결국 지방 청년들의 먹고 사는 문제로까지 적용되어온 것이죠. 그들이 지방을 떠나려 하는 진짜 이유를 배제시키는 주된 원인이기도 합니다. 배신자, 수도권 주체보다 무지한 주체 등으로 그들을 몰아세우면서 말입니다.
뻗어나가고 싶은 간절함 때문
지방 청년들은 왜 수도권으로 몰릴까요. 약간의 여담을 곁들이자면, 제가 독일어 시험을 준비할 때, 개인적으로 힘겨웠던 듣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토론을 듣고 사회자, 토론자들의 입장을 고르는 문제였는데요, 가장 자주 출제됐던 주제가 '도시와 시골 중 어느 곳을 더 선호하는지'였습니다. 하도 많이 듣는 바람에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게 되었죠. 왜냐하면 이유가 항상 비슷했거든요. '시골은 놀거리가 없어서 문화생활을 즐길 수가 없다.'. 대부분은 이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았습니다.
독일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에서 시골을 보는 시선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깨끗하고 조용하지만, 지루하고 문화생활이 어려운 곳. 그래서 시험에서도 대충 이러한 맥락에서 찍는다 하더라도 왠만하면 정답이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들에게는 도시로 떠나는 진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지루하고 문화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그들의 인생을 위한 선택에서 말이죠.
지방의 경우, 역사적으로 산업도시로 거듭난 경우가 많습니다. 지방 청년들의 일자리, 용돈벌이도 공장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일자리 네트워크 또한 학교에서 연결해주는 건 부실해서 차라리 몇개월동안 꾹 참고 아는 지인을 통해 공장일을 나갑니다. 하지만 공장 안에서의 현실은 너무도 열악합니다. 물리적인 사건사고, 산재 보험 미적용, 확실하지 않은 계약체결 등 제대로된 환경이 조성되질 않습니다. 정규직으로 채용이 된다 하더라도요.
여성들에게는 이 산업도시가 제한적인 곳입니다. 제조업 공장직들은 여성 채용이 잘 이뤄지지 않죠. 그래서 가정 돌봄이, 사무 보조직 등의 핑크 칼라 일자리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경력으로 연결될 수만 있다면 '제한'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겠죠. 사실상 사회에서는 해당 일자리들을 경력으로 봐주는 경우가 드뭅니다. 오히려 '경력 단절'로 바라봅니다. 지방 토박이 여성들은 단기직, 계약직 커리어패스의 선택지를 반강제적으로 고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이를 양승훈 교수는 '산업 가부장제'로 표현합니다.
공부라도 한다면, 대학 졸업장이라도 따놓는다면 먹고 살 수는 있다고 항상 들어온 청년들에게 '지방'이라는 공간은 좁은 세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년들의 일자리는 많다
노동 시장 침체로 지금의 대한민국은 떠들썩하죠. 청년들의 일자리는 부족해지고, 심지어 무경력으로 30대에 접어드는 청년들이 많아질 거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인턴은 금턴이 되고, 정규직 채용은 중고 신입들간의 경쟁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청년이라 그런지, 취업 난조라는 메시지만 여러통 받아봤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일자리는 많습니다. 정부에서도 하도 청년 실업, 취업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니 일자리를 계속 제공은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문제가 사그라들지는 않고 오히려 심각해지는 이 현상.
Fixing numbers 숫자와 싸워야 할 뿐만 아니라, 제도와 지식과 함께 싸워야 하는 상황입니다.
청년들은 지금껏 사회에서 바라는 고학력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공부가 싫더라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각자 최선의 대학을 선택해왔습니다. 세대가 거듭날수록 학력은 고점을 향해가니 청년들이 바라보는 직장의 기준치도 점차 높아져 갑니다. 눈을 낮추기만 한다면 백수 인생은 면할 수 있죠.
'그래도 우리가 대학은 나왔는데..' '이왕 학력에 맞춰서 멋진 삶을 살아보고 싶은데..'. 현장에서 느껴본 환경의 열악함, 계속해서 부딪히는 유리천장은 치열하게 도전해보고 싶은 청년들에게 갑갑하지 않을까요.
그런 청년들에게 지방의 일자리를 던져준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라 봅니다. 산업도시를 성장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의 노동 환경부터 시작해서, 커리어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까지. 지금보다 더 고급으로의 노동시장을 꾸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숫자만 늘리는 방안은 신 신고 발등 긁는 격이 되어버립니다.
이번 강연은 여태까지 결과만 바라본 현 사회를 아프게 꼬집습니다. '지방'의 틀에 그들을 가둬둔 채, 무의식적으로 위선의 상처남기기도, 가능성을 제거해버렸던 그 세월들을, 오로지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의 결과로만 단조롭게 만들어버린 현 사회를요. 시급하게 해결해야하는 문제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잠깐 뒤로 물러서서 그들의 복합적인 심정을 헤아려보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수도권에서의 삶이 당연하게 스며들 때 즈음, 많은 이들의 출발선으로부터 복합적인 감정에 잠겨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