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惟 - 네 가지 생각에 관하여
‘四惟(사유) - 네 가지 생각에 관하여’는 큰 주제 하나와 그것으로 묶일 수 있는 네 가지 생각에 관해서 다룹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은 늘 생각으로 가득 찬 것 같습니다. 그만큼 다채롭고 남기고 싶거나 소개하고 싶은 것들 역시 많을 것입니다. 계절, 역사적 사건, 독서, 여행, 학교생활 등 평범할 수도 있고, 특별할 수도 있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떠오르는 네 가지의 생각을 담아 소개하는 방식으로 글을 쓸 예정입니다. 부족하지만 다양한 것들을 보고, 그만큼의 다양한 생각을 여러분께 정성을 담아 소개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번 사유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방학 동안, 가장 의미 있는 활동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는 독서 모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독서 모임과 거기서 읽은 네 권의 책을 읽고 들었던 네 가지 생각이 담긴 서평을 소개합니다.
독서 모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6년 초반이었다. 수능 이후 많이 놀았지만, 틈틈이 책을 읽던 와중 독서 모임을 한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꽤 관심도 생겼고 주변 지역에서 찾아보겠다고 생각도 했지만 설레는 새내기 생활 준비 등 곧 마주했던 다른 바쁜 일들로 뒷전으로 밀려났고 어느새 잊어버렸다. 대학에선 그때보다도 책을 많이 읽지 못했고 시간은 계속 흘렀다.
그러다 작년 하반기, 내가 대학 생활 도중 놓치고 있던 것들이 많아 보여서 다시금 나를 돌아보았다. 인문학적 주제들에 관한 관심과 성찰, 그리고 결정적으로 독서가 너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인문학 관련 활동, 출판사 관련 활동을 하며 다시 조금씩 책을 꾸준하게 읽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가짐을 계속 이어갈 방법을 찾다가 문득 독서 모임이 다시 떠올랐고 이번에는 어떻게든 꼭 활동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독서 모임 <서브젝티북: 주관적 독서 모임>을 추천받았다. 그렇게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나는 독서 모임에 참여했다.
꾸준하게 책을 읽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독서 모임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얕음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얕음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란 대개 이런 것이다. 이번에 읽었던 책 ‘시지프 신화’를 예시로 들자면 “시지프 신화 알아?” “알지. 알베르 카뮈 책이잖아." 거기서 끝이다. 아무리 유명하고 좋은 책이어도 책의 제목과 저자만 아는 등의 상황이다. 혹 내가 다른 사람의 리뷰를 찾아보고 대략적인 전개와 내용을 알더라도 결국 그것은 내가 온전히 읽고 확장한 나의 고유한 생각과 느낌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누구의 생각이 더 깊은지 정도를 논하고 비교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 모두 다르듯 그 자체로 다른 것이다. 소위 ‘얕은 지식’들이 많았던 것이 도리어 부끄러움을 더 강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이러한 감정을 느낀 이상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번에 읽은 네 권의 책으로 이러한 감정을 완벽하게 해소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 부끄러움을 해소하는 과정의 부분이고, 앞으로도 해소해나가는 발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독서 모임 안의 세부적인 여러 모임 중에서도 두 달 정도 격주에 한 번씩 만나서(첫 주만 바로 다음 주에 만났다.) 조금은 두꺼운 편에 속하는 책을 읽는 모임에 참여했다. 책은 함께 활동하는 구성원들이 처음 모이는 날 사전에 생각해온 책 중에서 정해졌다. 나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 등을 생각해두었다. 그중에서 시지프 신화가 같이 읽을 책 중에 선정되었고, 각각 다른 분들이 생각해두었던 책 세 권이 더해져 네 권이 정해졌다. 함께 읽은 네 권의 책에 대한 네 편의 서평을 소개하려 한다.
책 관련 팟캐스트를 통해 내용은 대략 알고 있었지만 읽지는 못한 책이었다. 읽고 싶었지만, 생각은 못 하고 있었는데 다른 분께서 생각해둔 책이어서 감사하게도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다.
왜 “좋아하세요?” 가 아니고 “좋아하세요...” 일까? 이 책을 접하고 읽는 많은 사람이 한 번쯤 했을 것 같은 질문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실제 작가 역시 이 줄임표 세 번에 대해서 강조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부족하지만 읽은 대로 이 제목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시몽이 쓴 편지에서 직접 드러나는 표현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의문일 수도 있고 “브람스를 좋아해 보세요, 좋아해 주세요.” 같은 의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시몽은 공연 와중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지만 그 시점에서의 시몽과 폴의 관계를 본다면 “나 장난꾸러기 시몽을 좋아해 보세요, 좋아해 주세요.” 같은 의미로도 보였다. 시몽의 사랑이 가득 드러나는 입담과 사는 집의 내려가는 계단에서 폴을 향해 팔로 훅 들어오고, 어머니의 파티에서 차를 몰고 폴을 따라온 모습과 폴이 적은 “빨리 돌아와요.”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오는 등의 적극적 행동, 혼자만의 상상,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는 배려 등 그가 보여주는 것들이 다 저 의미로 연결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괜히 브람스가 제목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니라, 시몽과 브람스에 대해서 연관을 지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맨 마지막 부분에도 나오듯 브람스가 실제로 자신에게 은인과 같던 로베르트 슈만이 죽은 후 과부가 된 14살 연상의 클라라 슈만에게 연정을 가지던 것, 시몽이 이야기한 브람스와 로제가 좋아한다고 언급된 음악가 바그너는 (그들 사이의 관계에 평론가 그룹 등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이 영향을 준 것도 있지만) 대립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둘 사이에서 끝나지 않고 추종하는 무리로부터 계속된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브람스라는 음악가를 알고 보니 새로이 보이는 부분들도 흥미로웠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단언컨대 심리 묘사에 관한 것이다. 외로움을 느끼고 시몽에게 이끌리는 듯한, 그러면서도 로제에 의지하는 폴, 수줍음을 가진 것 같아도 적극적인 시몽, 폴과 다른 여자를 넘나들며 다양한 감정을 가지는 동시에 시몽에게는 질투심도 가지는 것 같은 로제를 비롯한 인물들의 심리가 세밀하고 뛰어난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단지 하나의 가치만으로 가득하지는 않은 것이 인간 심리의 복잡함이지만 그것이 온전히 드러남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인 요인이 되는 것 같았다. 줄거리는 어떻게 보면 단순한 삼각관계, 로제와 시몽을 넘나들다 결국은 로제에게 돌아가는 폴의 이야기지만 그 안의 세심한 심리 묘사와 극적인 장면들은 한 편의 인상 깊은 영화처럼 이 책을 술술 읽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개인적으로 18장이 가장 영화 같은, 극적인 장면들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한다. 저녁 식사 후 로제가 다른 여자와 춤을 추고 시몽은 폴과 춤을 추던 중 로제가 폴을 향해 손을 뻗는 장면이 하이라이트. 한 편의 영화 같은 책을 원한다면 꼭 추천하고 싶다.
네 권의 책 중 나에게 가장 생소한 책이었다. 저자인 수전 손택도 잘 모르고 있었기에 다시금 부끄러웠었다. 제목부터 고통에 대한 공감 등 뭔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할 것 같았던 책.
<서평>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오늘날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단지 사진과 TV, 신문과 방송의 등장은 어느 때보다도 그 고통을 실감 나고 다양하게, 그리고 어쩌면 더더욱 자극적으로 우리의 발걸음과 손길, 눈길이 가는 곳에 놓아둘 뿐이다.
손택은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눈길이 가고 손길이 가며 자극에 익숙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반응을 보이는지, 저런 매체들로 인해 현실 인식은 어떻게 되는지, 분쟁이 곧 현실인 곳에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을 염려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고 했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할까, 텍스트와 이미지를 통해서만 전쟁을 인식하는 이들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일까. 이러한 의문들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생겨났다.
“사진이 먼 곳에서 벌어지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것은 현대적인 경험이다. 기술과 매체의 발달로 타인의 고통을 접하기가 이렇게 더 수월해졌다고 하여 우리의 공감 능력이나 대처 등이 나아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사진을 보며 하는 생각은 뭘까 우리는 안전하다는 것? 그저 다른 공간, 다른 시대라고 보는 것? 안타까움? 동정? 다양한 생각들이 있겠지만 우리는 그 고통이 벌어지는 바로 그 현장과는 다른 어떠한 괴리감, 거리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공감이나 대처를 정체시키는 것은 아닐까. 사진이 없던 시대에 저 험준한 산 너머 동네의 소식, 바다 건너 머나먼 타국의 소식을 듣던 옛날 사람들의 심정과 오늘날의 사람들의 심정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조금은 달라졌다고 해도 확실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일상, 우리의 일부가 되었을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손택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한다. 흔히 오지랖이라고 하는 것이 넘쳐나는 것 같으면서도 무관심한(특히 고통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래서 아이러니한 요즘의 세상에서 한 번쯤 눈여겨볼 문장 같다.
이에 더해 사진과 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 이 책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룰 수 있지 않나 싶다.
사진은 정서를 구체화하고 개인적인 기억의 공통의 매개, 어떤 일이 일어났고 이 일은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사진이 갖는 상징성으로 볼 수 있었다. 한편 사진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이런 의문도 들었다. 전쟁을 잘 담은 사진은 무엇일까? 초기 전쟁에서 보였던, 연출된 것이지만 그렇기에 극적인 사진일까? 정말 그럴듯하지는 않아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사진일까? 당연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세상에서 일어난 여러 전쟁들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연출적인 모습들과 속임, 기만 등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사진과 TV, 신문방송의 발달로 그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이 된 것 같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고 인간이 정말 이런 정도인가 싶은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이 전쟁이지만 한편으로 인간은 세계가 모두 평화로웠던 시기가 손에 꼽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전쟁을 벌이고 그 대가와 영향 등을 고스란히 받아내면서 깨달은 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러이러한 행위는 범죄야”라며 전쟁범죄에 대해 구체적인 협약과 처벌이 이루어지는 등의 것들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궁극적으로는 수전 손택의 이 문구가 깨달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마지막으로 서양인들이 점점 전쟁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보며, 스펙터클이 되어야 흥미를 보인다는 스펙터클의 사회,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있고 이국적일수록 더 죽은 자, 죽어가는 자의 모습을 더 분명하고 완전하게 볼 수 있다며 이러한 고통이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에서만 일어난다는 저널리즘의 모습이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 주민들을 인종적 차별의 구경거리로 만들던 것과 다르지 않은 관행이라며 말한 부분은 서구 중심주의적 시선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더불어 100년 전만 해도 그러지 않았던, 지금 유럽의 평화로운 상태가 당연하다는 것 같은 태도는 최근의 테러리즘을 보고 다시금 또 생각하게 했던 부분.
여러모로 생각과 고민을 계속하게 했던 책이었다.
카뮈의 <이방인> 책을 읽었기에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모임에서 본인이 제안했던 책. 그때는 몰랐지만,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후로 처음으로 문장 자체가 쉽지 않았던 책.
<서평>
책을 통해 느낀 것은 부조리에 대해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왜 부조리 속에 살아가고 있을까?
문득 병원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 있다. 어린아이부터 신체가 가장 발달한 청년, 그리고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유로 많은 이들은 병원을 찾는다. 그만큼 불완전한 것이 인간의 신체이다. 문제가 있다면 다수가 눈에 보이고 신호도 오고 기술적, 학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신체조차도 불완전함과 어긋남 속에 있는데 하물며 이성과 사고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이성과 사고는 완벽할 수는 없다. 그에 따른 행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고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든 부조리는 이렇게 두 가지 항의 비교에서 생성될 것이다. 인간의 판단에는 완전한 해결책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존재의 근원적 부조리함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어떤 상황에서의 판단, 해결책이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은 누군가에겐 부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누가 완전하고 완벽한 해결책이자 진리가 된다고 볼 수 있을까. 부조리는 계속 인간과 이 세계와 함께인 것 같다.
부조리의 인간이 추론 끝에 찾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윤리적 규칙들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들과 살아 있는 숨결이라고 했다. 실제의 삶과 우리가 윤리라고 부르는 것들 사이에선 종종 괴리가 생기곤 한다. 이것 역시 불완전한 이성의 한계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대개 치열하고 첨예한 대립을 일으키는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그 사이에서 인간은 고뇌하고 통찰해야 한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이 낳은 두 아들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불완전하기에 세계에는 대립이 있을 것이고 부조리는 그러한 대립이 있으면서 존재하건만 그중 어느 하나를 부정한다면 부조리를 피하는 것이 된다. 산다는 것은 부조리를 살려놓는 것이고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라고 카뮈는 이야기한다.
불완전한 우리의 삶이 애증의 이 부조리를 보고, 그것을 안고 걸어가는 삶이라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부조리의 승리에 대해서는 고통을 고뇌하고 통찰하며 결국 거스를 수 없는 진리의 인식으로 상쇄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말이다.
시지프 신화의 시지프를 통해 카뮈는 당시 노동자의 운명이 시지프 못지않게 부조리한 상황이라고 이야기한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말해주는 그대로다. 카뮈는 그들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을 주문하며 부조리를 안고 가면서 끝내 그 부조리의 승리로 다가가기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류 3부작(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중 유일하게 읽지 못하고 있던 책. 신기하게도 결과적으로 출간된 순서와 반대로 읽게 되었다. 평소 빅 히스토리 책을 즐겨 찾는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면서도 쉽게 술술 읽히는, 여러 분야를 얕게 다룬다는 등의 비판 여지와 별개로 전달력이 정말 뛰어나다고 생각한 책.
<서평>
책을 읽고 나니 마치 호모 사피엔스를 다룬 거대한 보고서를 본 기분이었다. 만약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이 책을 소개한다면 우리조차 인식하지 못하던 면모까지 알게 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미약한 존재였던 호모 사피엔스는 인지 혁명으로 지구에서 그들의 범위를 넓혀가고 농업 혁명, 과학 혁명, 산업 혁명으로 정착 개념, 문자와 숫자 체계, 시간 개념을 만들며 시스템을 만들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본인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욕망을 스스로 창조해낼 수 있을지와 같은 신적이고 창조와 관련한 의문까지도 다다르게 되었다.
책에서는 선사시대의 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호모 사피엔스의 총체적인 역사를 다룬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같은 이른바 ‘빅 히스토리’ 책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런 빅 히스토리는 여러 학문 분야를 곁다리로 다룬다는 등의 비판에도 직면하기도 한다. 우리의 기준에서 더 머나먼 과거와 관련된 내용일수록 관련 흔적이 적은 경우가 많기에 유발 하라리가 책에서 다룬 모든 것에 대해 완벽하게 무언가를 제시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호모 사피엔스에 관한 다방면의 지식을 끌어와 거대 담론을 담아내려는 그의 노력, 그리고 특히나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여 잘 쓴 글이라는 것에 우선 호평을 하고 싶다.
처음에는 인지 혁명 부분에 주목했지만 계속 읽다 보니 대부분의 정치적, 사회적인 차별의 기원, 제국의 형성과 해체, 자본주의의 원리와 과학혁명의 원리와 과학의 진보와 얽힌 정치와 경제, 우리의 종교 등에 관해서도 설명하는 부분에 더 눈길이 갔다. 이렇게 호모 사피엔스가 곳곳에 자리를 잡은 후 만들어낸 시스템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연한 설명을 보니 스스로 모르고 있었거나 놓치고 있었던 것이 많아 보였다. 또한, 우리가 세상의 많은 문제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조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정치적 사회적 차별을 비롯한 문제들이 갈등을 유도하는 자극적인 미디어와 그에 따른 맹목적인 여론몰이나 흑백논리로의 충돌 등 해결로 나아가는 길이 흐려지지는 않는지 우려하게 되었고 놓쳤던 가치와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을 다시 상기시킨 것 같다. 하라리의 말대로 미래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존재를 넘어서 후손들이 신적 존재로 거듭나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사라져도 이러한 논쟁들이 중요한 것은 거듭나는 과정이 결국 인간의 영향과 설계 아래 이루어지기에 큰 연장선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논의가 어떻게 오고 가는지에 따라 우리 후손들이 나아가는 방향 역시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을 보고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것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그 이유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겠다고 공감한 부분들이 적지 않았다.
저자의 말대로 역사는 스스로 예측에 대해 반응을 한다. 예를 들어 이 세계에 세워진 수많은 나라가 타국의 공격을 예상하고 군사 시설을 정비하고 물자를 모으고 기록을 보존했다. 그것이 성공과 실패와 관계없이 반응은 이루어졌다. 경제학과 같은 정확한 예측, 미래를 알아내기 위해 역사 연구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역사 연구는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공감했던 두 문장을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첫 번째 문장이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앞서 유럽인들의 식민지배, 인종차별 등의 것들은 굉장한 우연에서부터 시작되어 고정되고 시스템이 그것이 마치 증명되듯 이루어지면서 이런 부분은 역사적 맥락에서의 연구가 없이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연구를 보면 결국 지금 존재하는 구조, 체계, 상황과는 달랐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종종 역사를 교과적인 시선에 갇혀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실을 다루기에 그 사실을 암기해야 한다는 인식에 빠진다. 단편적인 사건과 인물, 지도상에 나타나는 전개를, 심지어 배경과 영향까지도 그대로 암기해버린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일기를 외워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음.” 하고 끝나면 그것이 현재에 주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끝없는 대화, 역사를 잊지 말자고 하는 데에는 과거의 사실을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들을 지평을 넓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을 소개하려고 한다.
“대부분 역사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은 수많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역사 연구의 추세가 점점 미시적인 것에 주목하고 있기는 하나 아직은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개인의 행복과 고통에 주목해야 역사에 대해 더 다각적인 이해와 공감이 가능해지고 우리의 지평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저자가 이야기하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이라고 말한 우리를 돌아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해 우리가 더 많은 고민과 논의를 할 것을 주문하는 책.
유발 하라리의 인류 3부작(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중에서 꼭 제일 먼저 읽는 것을 추천한다.
덧붙여 하나 더 언급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다. 문화적 실체이자 집단으로의 문명을 이야기하며 굉장히 포괄적인 개념인 문명에 자신을 귀속시킨다고 본 책이다. 여기서 인종차별의 과정을 지나 문화적 차별에 대해 언급한 이 책의 내용을 보니 다시금 떠올랐고, 문화가 가진 영향과 결속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2월의 마지막 날, 독서 모임도 마지막 시간을 가졌다. 나는 독서 모임 구성원 중에서 가장 먼 길을 왔다 갔다 했다. 다른 사람들의 배가 되는 거리를 오고 가는 모습을 많이들 대단하게 여겼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이 거리보다 나에게는 지난 3년간 마음속 어딘가에 있던 이 활동에 대한 열정을 다시 찾아서 실현하기까지가 더 어려웠고 멀게 느껴졌다. 그렇게 시작한 활동이라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초심을 잃지 않아서, 이 활동을 가로막는 일들이 없어서 꾸준하게 소감문을 다 썼고, 지각하거나 결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뻤고, 감사했다. 덧붙이자면 모임에서 나누었던 것은 비단 네 권의 책만이 아니다. 각자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각자 책을 읽은 소감과 같이 나누었으면 하는 질문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는 그 이상의 다채로운 이야기로 모임을 가득 채웠고, 힘들다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시간으로 만들었다.
세 시간 정도의 만남 후에 돌아가는 길, 버스는 항상 양화대교를 건넜고 여의도의 야경이 보였다. 그 바쁘고 빛나는 세상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오늘 하루도 많은 것을 배웠다,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온몸을 덮어 가는 길을 포근하게 했다.
방학의 시간은 마치 물을 움켜쥔 듯 손에 한 줌 남아 있지 않은 채 모두 빠져나가 버렸다.
하지만 독서 모임에서 배운 가치들은 그 손에 남은 귀한 알맹이다.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주신 분들에게 이 글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