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지만 중요한 문제
한국 좌-우 양극화 담론에 대한 박사논문을 쓰고 3년이 지난 지금, 솔직한 심경은 지겹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던 문제 해결과는 무관한 것이 학문의 체계이고 쓸데없이 객관성과 이성적 자아비판 능력만 다른 능력에 비해 거대해져서, 나는 말을 고르고 생각을 정비하는 시간에 남들은 본인의 선민의식이 명하는 곧이곧대로 SNS 같은 가벼운 허공에 뱉어 버리거나, 타고난 모범생 본능에 충실하여 정석적 기준에 부합하는 논문을 척척 써 내니.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라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드는데 사실 그런 나의 모습마저도 자랑스럽다. 그게 나니까.
사회적 거리두기에도 재능이란 것이 작용하는데 나의 집순이 잠재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발견을 얻었다는 것이 이번 코로나 사태의 최대 성과이다. 그래서 앞으로 갈 길을 더 자유롭게 탐구하고, 걸어온 길을 회고하게 된다.
박사 전에는 표면적으로나마 전해지는 우파, 좌파의 사고 체계와 토론 문화가 제한적이고 저급하다고 느꼈었고, 생각해 볼수록 저 정치인 양반들이 제 아무리 명백한 사이코패스라도 바보는 아닐 텐데 (실제로 지능과의 상관관계가 유의미하다) 왜 저러지?라는 합리적 의심이 심화되는 중에 나의 박사 행 열차는 이미 자동 예매 완료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박사 중에는 나 자신의 헛소리와 남의 헛소리에 시종일관 파묻혀 살다가 아하, 헛소리에는 계급이 상관없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오히려 계급이 높을수록 헛소리의 무게만 커진다. 처음에는 저 계급의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하다니?라는 인지 부조화라도 신선한 충격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적응이 되어버렸다. 안 그래도 위계를 무시하는 성향에 정당성까지 쟁취했달까.
박사 후에는 위 사항의 해결은커녕 설명이 용이해진 것조차 없다. 하지만 세상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이다.
오늘의 기사도 사전 맥락을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서 생략해야 한다. 독일 좌-우 담론의 학문 영역 잠식에 대한 내용인데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부연설명을 개시하기도 전에 나 자신이 이미 질려 있다. 본문의 여성 사회학자는 독일 근 몇 년간의 최대 난제인 극우 포퓰리즘에 대해 "이론적 공감"이라는 원칙을 따라서 분석한 저서를 출간했지만 특정 세력의 벽에 부딪혔다. 추가적으로, 표절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렇듯, 독일이든 한국이든 논문 표절 의혹은 거의 일상적일 정도다. 특히 정치사상 진영과 얽히면 정당한 혐의인지 아닌지 표면적으로 확인하기 매우 어려워진다.
다름슈타트 대학 사화과학 교수 코페취 씨는 작년에 저서 "분노의 사회. 글로벌 시대의 극우 포퓰리즘"을 출간한 후 학계와 언론의 매서운 질타를 정면으로 맞았다. 비판의 차원은 복합적이다. 우선, 저서를 향한 표절 혐의가 불거졌지만 이것은 객관적 절차들로 인해 확인 가능한 것이다. 그걸 차치하고 이 책이 정치적 반향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차원의 비판이다. 규정에 따른 위반과 전혀 다른 기준으로 정죄해야 한다. 하지만 후자는 아직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표절 의혹을 핑계로 책의 문제성의 여부를 전혀 살펴보지 않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즉, 우리가 아직 밝혀야 하는 것은 본 저서의 사회학적 가치에 대한 평가와, 저자를 향한 정치적 시비에 대한 평가, 이렇게 두 가지다.
코페취 교수의 저서는 증가하는 극우 포퓰리즘을 계기로 삼아서 사회를 분석한다. 그러기 위해 극우 포퓰리즘을 사회적 현상으로서 진지하게 바라보고, 해당 지도자들과 지지자들이 위험한 사상을 선동하거나 선동당했다고 폄하하지 않는다. 본 책은 현 독일 극우정당 AfD의 부상을 설명하는 작품으로서 빠르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코페취 교수를 둘러싼 불협화음이 있었고, 이는 그녀 개인에 대한 소문과 극우 포퓰리즘을 변호한다는 혐의까지 포함했다. 결국 표절 혐의로 인해 출판사는 본 책의 판매를 중단했고, 그로서 논쟁도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 논쟁이야 말로 정치사상의 담론 불능을 보여준다. 대학가에서 툭하면 유행하는 "cancel culture"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면 보이콧한다는 뜻으로, 온라인 집단 공격을 초래하기도 한다고 이 신문 기사에 잘 설명되어 있다)의 특징이기도 하고, 코페취 교수의 실증 사회 과학 연구를 포함한 연구 실적들이 사회 교육학적 훈육으로 오해되는 이유다. 정치적 기준에 "알맞다"라고 여겨지지 않는 결과를 발표하는 연구들은 점점 더 도덕적 괘씸죄에 처해지고, 실제 내용에 기반한 반론은 뒷전이다.
예를 들어, 안네 프랑크 기념관 소속인 교육 연구원 울릭 씨는 월간지에 다소 전투적인 제목인 "악마와 공감하다"라는 기사를 기고했다. 이 월간지는 후에 기사를 홈페이지에서 소리 소문 없이 내렸다. 코페취 교수가 극우 정당들의 인기를 이해하기 위해 실증 자료를 사용한 걸 두고, 그녀가 극우 정당을 충분히 비판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혹시 그녀의 직원들과 지인들이 극우 정당 유권자들이 아닌지 상상하기까지 했다.
해당 기사의 저자는 또 다른 주간지에 기고했다. 코페취 교수가 포스트모던적 사회 특성을 비판한 것을 두고, 그녀를 과거에 극좌였다가 극우로 "변절"한 타 유명 인사와 비교했다. 하지만 코페취 교수의 책에서 포스트모던적 사회의 비판은 다른 역할을 지닌다. 오늘의 "현대인"의 사회적 특성을 정의하는 것은 국제화가 아니라, 동의하지 않을 경우 순간적으로 비난으로 변모하는 표면적 관용이다. 이건 바로 코페취 교수를 힐난하는 자들이 보이는 태도이다. 반면에 코페취 교수는 극우 포퓰리즘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좌파가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에 어필하는 정치를 펼치면서 도시 인구만을 대변하는 근시안적인 사상을 따르기 때문에 극우 정당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기에 실패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코페취 교수가 속한 학계는 그녀가 사용하는 용어 ("도시적 엘리트")를 극히 불편해한다. 그녀의 논리 체계는 이미 저명한 프랑스 사회과학자들이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비판했던 1999년에 사용되었는데 말이다. 시민들은 자신을 이상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국가를 향해 자아 성찰적인 관계를 꾸리는 대신, 국가의 명령을 개인의 삶과 일체화시킨다는 내용이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대학과 언론의 담론을 지배하게 되었다. 정체성과 상징성으로 먹고사는 주제들, 즉 온난화의 형평성, 젠더, 미적 원칙을 중시하는 삶의 방식, 그리고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주로 문화 엘리트에 속하지만 경제 엘리트에는 속하지 못한다. 반면 대학과 무관한 중산층, 즉 지방이나 외각의 인구, 그리고 도시의 극빈층은 아예 무시된다.
코페취 교수는 이론적 공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극우 포퓰리즘의 현상을 진지하게 성찰하기 위해, 즉 극우 정당 유권자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 그들에게 편견 없이 질문해야 한다. 파시즘 연구자인 그리핀 교수는 "이론적 공감"을 설명하며 극우 포퓰리즘 지지자들을 다루기 가장 좋은 벙법은 체계적인 감수성을 활용해서 그들이 지니는 혐오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코페취 교수도, 그리핀 교수도 "체계적인 감수성"이라 할 때 절대 외국인/유대인 혐오자와 감정적 동질감을 느끼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태도를 초래하는 사회적 원인들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극우 포퓰리즘 지지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회학적 인터뷰를 실행하라는 것인지, 코페취 교수의 비판자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요 목적은, 코페취 교수의 과학적 접근이 선동적이라고 시비를 거는 것뿐이다. 이들은 비슷한 접근들, 예를 들어 "낙후 사회" (나흐트웨이 저), "디지털 사회" (나세히 저)도 같은 이유로 등한시한다.
극우 포퓰리즘을 설명하기 위한 접근들을 탐구하는 연구자들을 우파 편향 사상이라고 낙인찍어 버리는 것은, 본인의 세계관을 벗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도덕적 분노의 표출일 뿐이다. 요즘에는 공개적으로 페미니스트 연구자, 예를 들어 사회 이론가 니나 파워 같은 학자조차도 인종주의자라고 불려지기에 이르렀다. 학계의 "cancel culture"는 반대 의견과 반론이 공론화되는 것을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지식이나 현실의 그 어떤 질서도 투쟁으로서, 정치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본다. 과거와 달리 진영 간 갈등은 마르크스에 따른 계급 싸움이 아니라, 권력과 의미를 선점하기 위한 투쟁이다.
틀림없이 대학 내부의 경쟁심이 하나의 근본 이유가 된다. 포퓰리즘을 완강히 반대하는 스타일이 아닌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학, 경제 양극화 연구, 가족과 젠더 연구 교수직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는 것이 비판자들의 자양분이다. 위에 언급한 울릭 씨 같은 비판자들은 사회 현상의 해석을 두고 여성 정교수들과 경쟁하며 자신을 뽐내기 원한다.
코페취 교수의 분석은 현재 대학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이 맞다. 그녀는 그녀가 속한 환경의 취약점, 즉 과학적 통찰이 정치 훈육적 목적에 포로 잡히는 것을 지적하고 분석한 것이다. 저서에 대한 표절 의혹에 그녀의 사회학적 진찰이 묻힌 결과는 유감스럽지만, 놀랍지는 않다. 학계는 가면 갈수록 의도적으로 의견을 진실 탐구와 혼동하고, 객관적 과학 기준과 정치 훈육적 목적을 바꿔치기하기 때문이다.
사회학 이론을 읽는 것이 취미인 드문 자가 아닌 이상 (나는 우선 아니다) 아주 쉽지 않은 내용이다. 그래서 나는 결론만을 중점으로 이야기해 보겠다.
독일은 전후 역사 소화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이는 한국에서 단골처럼 일본의 전후 태도와 비교될 정도로 예외적이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 정확히 말하면 약 2015년부터 독일 문화 엘리트, 정치 엘리트의 자존심에 보기 흉한 먹구름처럼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 있는데, 바로 극우 정당의 부상과 국가 의회까지의 입성이다. 이런 현상은 전후 이후로 처음이어서, 극우 정당을 반대하는 시민과 인사들, 정치인들은 그들을 입에만 올려도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환멸"을 드러내곤 한다.
나는 그런 현상을 볼 때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마치 스카이 캐슬의 자아도취적이고 성실하고 당돌하던 예서가 본인의 혈통에 하층민이던 엄마의 피가 섞였음을 깨닫는 순간 자기혐오에 몸서리치는 것을 보는 것 같다. 동시에, 적어도 대놓고 외국인인 나를 차별하지는 않는구나,라고 느끼며 안도하기도 한다. 현실의 삶에서 내가 과연 보이지 않게 차별을 당하는지 아닌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문제는, 독일인들이 극우파를 너무 정신적으로 멀리하려고만 하는 반사 작용 때문에 아무도 그곳에 눈길조차 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외국인으로서 우려되는 것은 사실상, 극우 정당의 출현 보다, 반 극우 인구가 "흉 보기에 바쁘지만 팔 걷고 개입하지는 않아서 사실상 방치되는 극우"이다. 극우가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어디든 인종차별이 존재하는데 나치 전범국인 독일은 어련할까. 게다가 경제적, 정치적 사정으로 인해 강화되는 것이 소수 집단을 향한 혐오와 차별이니까, 모두가 행복한 텔레토비 동산이 아닌 이상 음지에서 인종차별의 독이 졸여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외국인으로서의 내 생각은 이렇다. 독일의 극우파는 모두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독일의 극우파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떨거지들의 오합지졸 집단이라서 복합적인 이유와 동기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독일인들이 이런 가정조차 입에 올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정의롭고 깨어있다고 믿는 독일인일수록 이런 장벽이 크고 강하다. 아니 그럼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인간 말종이라고 이빨만 까겠다는 것인가? 그러면 그들이 저절로 없어지나? 그들이 갈망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이관대 극우 정당을 택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의 도출에 대해 기존 세력들이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인은 고사하고 사회과학 관련 모든 분야 학자들이 발 벗고 나서야 하는 과제가 아닌가? 왜 극우 세력에 가장 취약한 외국인인 내가 실질적 고민을 혼자 대신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의 "깨시민"적 허울은 나의 털끝 하나도 보호하지 못한다. 그들은 본인의 반 극우적 이미지를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반 극우의 칼끝에 선 외국인과 이민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극우에 취약한 계층의 인식의 이해와, 낙후된 이민자 사회 교화의 개선에 힘써야 한다. 하지만 전자나 후자의 상황에 처해본 적 없는 그들은 애초에 공감을 할 수도,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할 수도 없다. 반면 상위 기사에 등장하는 교수 같은 사람들은 본인의 능력을 극우 구성원의 진지한 이해에 활용하기 때문에 나에게 약 10배는 더 유용하다.
내가 자주 하는 상상이 있다. "노빠꾸"라는 말이 있는데 후진이 없다는 뜻이다. 소신의 표출에 필터가 없거나, 얼굴에 철판이 두꺼운 행위 예술가이거나 코미디언 같은 사람들에 쓰이는 표현이다. 내가 조금 더 노빠꾸로 태어났더라면 극우 정당에 인턴으로 지원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시대에 그들은 나를 화형 할 수도 없고, 자신들은 인종차별 정당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명분이 버젓이 있으니, 나를 끈질기게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조직 속으로 들어가서 내가 가는 곳마다 그들의 흔들리는 동공과 진땀을 유발하고 싶은 욕구가 희미하게나마 있다.
그 욕구의 뿌리는 무엇일까? 왜 남을 난처하게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믿는 신념이 틀렸다고 깨닫거나 나의 논리 체계의 한계를 자각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메테오처럼 충돌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익숙한 본연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럴 일도 없다. 극좌파든 극우파든, 엘리트든 시민이든, 도시인이든 지방인이든, 정체하면 부패한다. 덮으려 하는 오물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그때 나는 악취를 가장 먼저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