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삶과 일에 미치는 영향을 놓치는지
바람 가는 대로 전략 따위는 없는 낭만 고양이처럼 학과를 선택하여 한 단계씩 밟아왔다 보니 흡사 외교관 자녀처럼 다양한 이사를 해왔다. 이사라 함은 국가 간 이사도 포함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비유로서, 국가 간의 차이 마냥 다채로운 학과 간의 다분한 문화 차이를 많이 경험한 것이 나의 자산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과학대, 인문대, 지역학, 컴퓨터 공학으로 추릴 수 있는 분야들을 직접 가서 부대끼며 체험했다. 그 속에서 교육받은 산물이 나이니까 남의 얘기가 전혀 아닌데도, 애초부터 엉뚱한 (미대라는) 배경을 가지고 비교적 "학문"을 표방하는 석사에 입학했던 나로서는 끝내 제삼자의 시야로 박사와 박사 후 과정들을 관찰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학문을 표방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현장 전문가 양성에 가까운 프로그램의 석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대보다는 학문적 방법론을 가르치고 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박사를 시작할 때에조차도 미리 일관적인 틀의 교육을 받은 "진골" 정치학자가 아닌 입장에서 시작했고, 그래서 대부분의 교육적 상황에서 "이걸 왜 이렇게 하지?"라는 관점을 항상 뒷전에 가지고 있었다. 원래 교육의 방식에 대해 반항심이 있는 성향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관찰하던 중 자주 불편하게 올라오던 질문이 있었다. 내가 과연 1) 학문적 이론에 기여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온 것인지, 2) 사회의 문제를 개선하고 싶어서 온 것인지? 나는 1을 통해 2로 가는 건 줄 알았는데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2의 존재감은 점점 모호해져 갔다. 학문의 최대 관심은 길게 보면 사회의 발전과 안녕이지만 짧게 보면 전혀 아니다. 짧게 보면 학문의 최대 관심은 그들만의 오래된 토론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걸 학문적 이론이라고 한다. 나쁜 의미는 전혀 아니다. 이처럼 일상적이지 못한 토론의 몇십 년 간의, 때로는 수 백 년의 기다란 맥을 통해서 사상의 생명력이 유지되고, 사회에 중요하지만 등한시되기 쉬운 가치들을 매 순간 보존할 뒷심을 얻는다. 예를 들어 경제성장이 중요하지만 효율을 올리는 노력 탓에 인권이나 정의 같은 가치들을 등한시하지 않도록. 쉽게 표현하자면 만인의 행복을 성적순으로 매기지 않도록. 그런 무자비한 세계관으로 지구의 미래가 결정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 모든 학문을 관통하는 원동력이다. 어벤저스라고 치면 뒷방에 처박혀서 중요한 일들을 하는 조용한 히어로쯤 되겠다.
하지만 학문적 토론을 위한 토론을 나쁘게 말한다면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위험이 있다. 실제로 인문대와 사회과학대에서 가장 답답한 부분이 그것이었다. 논의의 시작은 분명히 실질적인 사회 문제였는데, 어찌 대화가 빙빙 도는 것 같은... 원탁토론의 목적은 분명 발표자의 연구주제에 대한 피드백이었는데, 어찌 다들 자기 할 말만 늘어놓는 것 같은... 이런 이질감을 느껴가던 중,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학자들은 인류 혹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자신의 주장이 옳기를 원하는 기로 사이에 항상 서 있고 후자를 원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말로만 듣던 상아탑의 어폐인 것이다. 본인이 더 저명해지고 더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회 문제 혹은 학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적 노력보다는, 본인 말이 한번 더 옳은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실재하는 이 세상의 옳고 그름이란 그저 관점의 차이에 불과하기에 그나마 자신의 말이 옳게 들리게 만드는 노력에 치중하게 되고 그것이 권위의식과 이기심, 쪼잔함으로 번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물론 위의 직업성 성향 발달의 전개는 최악의 경우만을 얘기한 것이니 모두가 그렇다는 일반화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베이스로 깔아야 더 이해하기 좋은 주제들이 있다. 모든 전문직이 그렇듯, 학계는 외부인이 경험하기에는 폐쇄적인 집단이지만 그런 것에 비해서 일반 시민의 삶을 크게 주무르니까. 가장 가까운 예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를 학자 개개인의 손에 맡기는 대학이라는 곳이 있고, 좀 더 먼 예로서는 정치와 정책에 관여하는 학자 출신 인물들이 있다. 그래서 오늘 다루고 싶은 주제는 학계가 주 무대인 학자가 현실 세계의 실질 정책에 기여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며칠 전 엘리트 학자 조직인 독일 레오폴디나 고등과학원에서 코로나 정책 완화에 대한 입장문을 발표했는데, 어째 언론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첫 기사는 선언문 중 학교 재개방에 대한 내용을 실제 현장에 투입될 교육자들이 따져본 것이고, 두 번째 기사는 고등과학원 학자들이 본 선언문을 발표할 자격이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기사 1)
3월 중순부터 독일 학교는 폐쇄됐다. 수요일 (4월 16일) 메르켈 총리는 주 장관들과 격리 정책의 완화를 논의하고 올해 학기의 계획이 결정된다. 논의의 기반으로 레오폴디나 고등과학원의 입장문을 사용할 예정이다. 해당 문서를 통해 학자들은 학교들을 "최대한 곧" 점진적으로 개학하기를 제안한다. 즉, 한 방에 다시 재개하는 대신 특정 학년은 먼저 개학한 후 나머지가 뒤따르는 형식이다.
문화장관의 대부분과 교사협회 다수가 선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와 현장 인력에게 강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헛된 희망"을 심는다는 이유인데, 점진적 개학이 요하는 조건은 지켜지기 힘들다는 논지이다.
그룹 사이즈: 고등과학원 학자들은 교실 당 최대 15명의 학생을 허하기를 제안한다. 쉬는 시간에도 이 그룹 안에서만 외출하며 다른 그룹과 격리한다.
비판: 교육노조 회장은 "이런 제안은 현실과 동떨어진다"며 대부분 초등학교 교실은 "규모가 크지 않다"라고 한다. 실제로 대부분 주의 학교 건물들의 규정 상 규모는 교실 학생 당 2 제곱미터이다. "15명의 학생이 2미터간의 거리를 유지하기에는 너무 좁게 앉는다." 추가로, 특수 보조 학교를 제외한 모든 학교 계열의 반 인원은 현재 제안된 15명을 훨씬 넘는다. 즉, 반을 나눠야 하는데, 만약 국어와 수학 및 외국어 과목에만 집중한다면 교사 배정도 가능할 듯 보인다.
하지만 노련한 교사들의 의심은 종식되지 않는다. 실업계 교사이자 아버지인 버켄 도르프 씨는 정부를 향한 공개 편지를 통해, 반 규모를 떠나서 "학교 건물, 통학길, 휴식공간 등에서의 간격 유지가 훨씬 심각하다"며, 학생들은 어리고 미숙하기에 감독이 없다면 간격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들은 교사들이 감독을 하든 안 하든 서로를 밀치고, 안고, 부대낀다. 말 그대로 아이들이기에 멋도 모르고 목적을 까맣게 잊을 것입니다."
통학버스를 이용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통계가 정확하지 않지만 교통부에 의하면 매일 통학에 버스를 이용하는 학생과 대학생의 비율이 30%라고 파악된다. 시골 지역의 경우에도 3분의 1 정도 된다. 그들을 모두 학교로 운반하면서도 간격을 유지하려면 운송수단의 수를 대폭 늘려야 한다.
인력 부족: 축소된 교실 인원에 따라 고등과학원 학자들은 수업 시간을 일괄 배치하기를 제안한다. 그로서 교사들은 오후에도 투입되게 된다 (주: 독일의 학교는 고학년이라도 늦은 오후까지 수업이 이어질 경우가 드물다).
비판: 교사들의 헌신을 전제로 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괄 시행 수업이 요하는 교사 인력이 부족하다. 교사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나이 혹은 과거의 병으로 인해 고위험 집단에 속한다고 교육노조 회장은 파악한다. 지역에 따라 젊은 교사가 많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고령의 교사가 주를 이룬다. 특히 독일의 경우 현 위기가 아니어도 극심한 교사 부족에 허덕인다. 특히 초등학교가 그렇다. "왜 하필이면 병균이 퍼지기 쉬운 학교들이" 가장 먼저 개방되는 곳들에 속해야 할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우선순위의 문제 즉 누가 아직 집에 남을지에 대한 지정: 어린 학생들을 위한 수업을 먼저 재개하지만 중학교 진학을 앞둔 (주: 독일의 학교는 중고등학교가 통합이다) 학년들을 우선으로 하자고 고등과학원 학자들은 제안한다. 즉 주에 따라서 4학년 내지 6학년생들이다. 반면 보육시설의 경우, 여름까지 그룹 당 5 아동으로 인원 제한을 유지한다.
비판: 일부 교사협회의 의견은 "교육적으로 무의미하다"이다. 4학년들을 진학 학교의 기준에 따라 준비시키지 못한다면 진학 학교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이유다. 또한 4학년이면 홈스쿨링으로 자기 주도 학습이 가능한 나이라는 주장이다. 차리리 1학년 같은 어린아이들이 더 많은 지도와 도움, 감독과 교류가 필요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보육시설이 계속 폐쇄될 거란 전망은 아동 부모들에게 씁쓸한 뉴스다. 어쩌면 고등과학원의 26명의 학자 중 여성은 2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의 결과라는 해석이 불거지고 있다. 만약 보육시설을 장기간 재개하지 않을 경우 230만 가구의 가정이 문제를 맞이한다.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들의 수업을 곧이어 재개하는 제안: 시험을 가능케 하되, 전염의 위험은 최소화하지만 수능 시험을 올해 전면 취소하는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비판: "초등학교 및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먼저 보내자는 제안은, 교육이라는 개념을 성적과 시험으로 치부함으로써 매우 낡고 협소한 이해입니다. 교육이란 더 포괄적인 것입니다."라고 교사노조는 말한다. 학생들 또한 14만 명의 서명을 모으며 반대를 표현하고 있다. 학생 대표는 "현재 조건은 불공정하며, 이로서 우리는 시험을 치르러 등교할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마스크와 위생 문제: 장기적으로 위생, 간격, 마스크 착용, 검진, 자가격리의 규정을 적용해야 한다고 학자들은 제안한다. 마스크를 수업과 쉬는 시간 중에도 착용하도록 한다.
비판: "이걸 어떻게 적용하라는지" 교육협회 회장은 말한다. 일반 학교 학생이 830만 명이고 직업학교 학생이 240만 명인데 "마스크를 어디서 구하라는 거죠?" 졸업반 학생들만이 점진적으로 먼저 돌아온다고 해도, 어린 학생들의 경우 규정을 진지하게 지키기란 쉽지 않다.
기본 위생의 경우도, 학교에 평균적으로 여학생 20명당 화장실 하나, 남학생 50명당 화장실 하나와 소변기 두대가 제공된다. 세면대는 더 드물어서 여학생 80명당 하나뿐이다. 비누, 수건, 소독제도 충분히 제공되어야 하고 화장실, 문고리, 난간도 하루에 여러 번 소독해야 한다.
"학교 재가동의 모든 결정은 심각한 위험을 동반한 사회 실험입니다. 그것은 폐쇄를 오래 지속해도 마찬가지고요. 정치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희생이 따를 겁니다"라고 초등학교협회 일원인 교육학자 뷔르겔만 씨는 말한다.
(기사 2)
독일의 고등과학원들은 수백 년간 상아탑으로 살아왔다. 평균 교육 수준의 시민들의 거친 세상에서 격리된 채 위대한 과학자들이 서로를 칭송하는 곳으로써. 2008년에 독일 정부는 프랑스와 영국의 모델을 따라서 보다 현실에 가깝고 자문을 제공하는 국가 아카데미를 창설했다. 그들은 그 역할을 그중 가장 오래된 고등과학원인, 1652년 산 레오폴디나 고등과학원에 위임했다.
전통 깊지만 대중에게 과소평가되는 고등과학원은 현 총리가 애용하는 정책 자문 기관으로 탈바꿈했다. 어느 분야의 정책이든 약 1600명의 연구 인원을 뽑아서 실증적 근거로 뒷받침하는 자문에 힘써왔다. 그리고 지금, 코로나 위기의 한가운데서, 너무나 임의적인 입장문을 들고 나와서 정치의 실행 영역으로 뛰어들었다. 큰 실수였다.
본 입장문은 읽기 힘든 학문 독어를 굳이 써가며 과도하게 일반적인 문장들을 남발한다. 서명자는 24명의 남성과 2명의 여성으로서 2020년에 납득하기 힘든 광경이다. 내용 자체는 특히 학교의 재개에 관해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사실은 본 제안들에 대한 극심한 반발도 과도하고, 고등과학원을 향한 전면적인 혐오도 과도하다. 입장문에는 좋은 발상들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접촉 경로 파악이나 면역 상태에 대한 데이터 증가에 대한. 그리고 고령 인구를 격리하라는 주장이 엄연히 차별이라는 반론을 대변해 주어서 통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바이러스 연구를 제외한 모든 기타 영역을 포괄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아무리 봐도 자만이다. 19장의 문서로 세상을 구하려는 시도는 아무리 똑똑하다 할지라도 무리다. 최근에 불거진 요구에 따라서 바이러스 연구자 외에도 드디어 사회과학자, 심리학자, 윤리학자들도 문서에 참여했음에도 마찬가지다.
다가오는 몇 주와 몇 달간 우리가 무엇을 반대하는지에만 초점이 맞춰지면 안 된다. 인구의 일부가 보기에 위험하고 틀렸다고 여겨지는 조치들도 부단히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예를 들어 헮홀츠 연구소는 한국과 비슷하게 전염 패턴에 기반한 강경 조치를 제안하지만, 독일의 정보 보호법과 화합될 수 있을 리가 없다.
우리는 여러 가치 중 어떤 가치를 더 중요히 여겨야 하는지? 정보보호 혹은 접촉 경로 파악? 학교 재개 혹은 낮은 확진율? 이러한 질문들을 이제 마주해야 한다. 약간은 후쿠시마 사건 후 원전 토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때는 "에너지 전환"에 대한 외침이 컸지만, 대부분의 사람의 관심사는 전환이 아니었다. 그저 원전을 버리고 싶었지, 풍력과 태양광을 탐탁히 여기는 건 아니었다. 바이러스의 위기를 통해서 터널의 끝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투쟁도 희생도 피할 수 없다. 고등과학원의 입장문은 그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딜레마의 증상에 불과하다.
독일의 엘리트 학자들은 탁상 정책을 펼칠까? 어느 면에서는 그들은 그래야만 한다. 세속의 사회적 압박에 시달리는 상태라면 개방적 사고는 희생되기 때문이다. 이번 건에서 그들은 자신의 할 일을 힘껏 한 것뿐이겠지만, 여성 학자가 2명이라는 점과 학교와 보육시설에 관련된 문제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버렸다. 그 때문에 작성자들이 현실감각에서 동떨어졌다고 더욱 비판에 불을 지피는 목소리가 세다.
학자들이 원래 현실세계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은 어느 정도 맞다. 나뿐만 해도 오랜만에 대중교통을 타거나 할 때 일반 시민들 일부의 언행이 거친 것에 대해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분명히 어릴 때 험하게 굴렀던 (?) 시절도 있어서 온실 속 화초는 아닌데 말이다. 그만큼 매일 수년간 주로 교류하는 사람들이 학자이거나 학생이다 보면 현실 세계의 인식이 평균 시민에서 미묘하게 벗어나게 된다.
어쩌면 이 논란은 학자들을 향한 또 다른 비판점과 맞닿아 있다. 바로 대중을 향한 과학의 전달에 대한 것이다. 대중의 삶에 뼈속 깊이 관여하는 정책 자문을 제안할 때, 대중의 심경을 배제해야 냉철한 분석이 나오는 필요도 있다. 하지만 대중이 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려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발상도 말짱 도루묵일 경우가 있다. 이런 가능성을 학자들은 너무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대중의 인식을 아주 망각한 채로 대중을 통치하는 정책에 개입할 거라면 학자는 정책 자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 순수한 결과 산출은 AI가 더 잘하니까 그런 학자는 머지않는 미래에 AI로 속히 대체되길.
수와 명제의 세계만 다루는 순수과학 내지 유사 영역의 학자라면 말을 안 한다. 엄연히 정책에 관련된 연구 분야이고 심지어 자처해서 정책에 개입하기로 했다면, 인간의 인식을 무시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게다가 시대를 못 읽는 것이다. 이미 다가온 미래의 예를 들어보자. AI시대다 뭐다 하여 인터넷의 플랫폼 서비스는 악플이나 유해 콘텐츠를 걸러내기 위해 자동 알고리즘의 힘에 의지할 필요가 점점 커진다. 그러면 AI에 대한 개개인의 신뢰가 필요한데, 혹시 알고리즘이 나의 비판적 의견을 유해물질로 잘못 판정해서 나의 발언의 자유를 억압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자율주행 자동차 등 실제로 생명을 걸고 신뢰해야 하는 문제도 큰 과제다. 그러니 미래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AI와 알고리즘, 기계 학습의 작동과 한계 내지 원리를 대중이 배우고 이해해야만 한다. 이걸 누가 할 것인가? 정보가 너무 많아 어지러운 이 현대 사회에 학자의 효용은 무엇인가?
위기가 닥칠 때, 학자들의 낡고 방치된 악습들이 아프게 드러난다. 이기심이 드러난다. 관습의 나태가 드러난다. 위기의 때에 본색이 드러난다고 했다. 지금이 예외는 아닐 것이다. 대중과의 소통과 현실적 영향에 대해 학자들이 고민하는 계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