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제주도까지 꾸역꾸역 노트북을 들고 왔는데 그냥 서울로 갈 수 없어 (괜스레 억울한 기분이 드는) 공항에서 한 자 적어보려고 꺼내어본다.
혼자 여행을 죽어라 싫어하던 내게 이번 여행은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모두가 함께 있는데 내내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끌시끌한 가운데서도 오롯이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사진을 찍을 때도 그랬고, 손그림을 그릴 때도 그랬고, 한 자 글을 적고 싶을 때도 그러했다.
다 함께 있지만 이어폰을 귀 깊숙이 박고 혼자만의 우주 속을 마냥 떠돌고 싶었다. 무척이나 그러했다.
하여 다음 여행은 혼자 떠나보려고 한다. 그게 어디든. 언제든. 훌쩍
그래도 제주도를 함께 왔으니 몇 가지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제주도의 기억을 들춰 간단히 적어보려 한다. 여행의 순간순간을 기록하지 않으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 감정, 이 벅참이 덜해지기 마련이니까. 제주도를 떠나기 직전, 어렴풋이 남은 제주의 기억을 들춰보려 한다.
이토록 또렷하고 선명한 붉은 태양을 본 적이 있었던가. 여러 번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헐레벌떡 뛰다가 태양을 놓치거나 타이밍을 못 맞춰 간신히 봤다거나 하는 기억들은 있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함께 한 적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짜릿한 순간이다. 서서히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내 마음도 뜨거워졌다. 혼자였다면 어쩌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주룩 흘렸을지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함께 하는 이들과 깔깔거리느라 더 깊은 감상에는 빠지지 못했다. 참 오랜만에 새벽길을 걸어 걸어 성산일출봉에 온 것도 좋았고, 처음 만났지만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은 운명의 끌림 여행지기들과 함께라 더 좋았었다.
두고두고 이번 여행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이유 중, 크게 차지할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사려니숲길에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한다. 너무 사람이 많고, 너무 유명해서. 나만의 공간 같은 느낌이 들지 않다는 이유로 사려니숲길은 나에게 큰 매력을 발산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의 기억 역시 마냥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숲길 자체가 주는 매력이 크지 않은 탓에 맨발걷기만이 줄 수 있는 매력도 조금은 반감된 듯. 그마만큼 장소가 주는 매력이 내게는 큰 의미를 차지하는 것 같다.
맨발걷기는 특이한 경험이긴 했다. 그러나 왕초보들에게는 다소 거친 길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포근포근한 흙길이나 진흙길이 아니라 당황했다. 나는 좀 더 부드러운 곳에서 진정한 힐링을 기대했었는데, 내 기준에서는 많이 거친 길이 오히려 긴장하게 만들었다. 발끝이 긴장하니 온 몸이 긴장했다. 이완의 이유로 맨발 걷기를 택하셨다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수준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진행해주시는 원장님께서는 특별히 초보에 맞춘다고 생각하셨다지만, 정말 초보의 감을 잘 모르시는 것 같다^^ 특히나 힐링, 이완을 위해 온 초보들이라면 간간이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는 고운 모래나 작디작은 돌? 등을 기대했으며 혹은 진흙이 꼬물꼬물 발가락 사이로 얼굴을 빼꼼히 빼는 장면을 연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발바닥에 자극을 주어 몸의 순환에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진정한 이완을 통한 힐링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거친 길이었으며 걷는 내내 발끝만 보느라 숲의 기운도 제대로 느끼지 힘들었다. 나는 그나마 어쩌다 하늘 한번 찍겠다고 고개를 자꾸만 들어 올려 나뭇잎 사이사이, 반짞이는 햇살을 보긴 했으나 내내 긴장한 탓에 발끝만 보고 걸었다는 그는 하늘 한번 제대로 못 보지 못했을까 싶다.
그래서 또 느낀다. 내가 아는 것과 내가 어림짐작하는 것과 상대방이 느끼는 것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것을!
원장님께서는 정말 세심히 배려해주셨겠으나, 수준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들의 느낌은 그만큼의 차이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숲은 좋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참 좋아하는 내 숲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이 정해주는 숲 말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숲 말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가고픈 내 숲으로 가야겠다. 그리고 내 걸음, 내 방식으로 걸어야겠다.
우연히 방문한 제주창고
인스타그램에서 워낙 유명한 제주도 빈티지샵이라고 하던데. ㅍㅎㅎㅎㅎ 정말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빈티지스럽다.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 사장님마저 빈티지스럽다. 요즘 애들이 딱 좋아할 만한 그런 공간이다. 젊은 사장님들이 해외를 돌며 빈티지스러운 옷들을 구해오신다는데.
예전 아프리카에 갔을 때. 구제시장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던 옷들이 생각났다. 아마도 그런 곳에서 유명 브랜드, 명품 티셔츠 한 벌을 100원, 200원에 구입해오시기도 하겠지? 마치 우리가 의류수거함에 버리는 옷들도 어딘가에선 비싼 가격에 팔릴지도 모르는 것처럼.
뭐 어디서 온 옷이건, 누가 입던 옷이건 그런 것은 하나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제주도 해변가, 어느 작은 컨테이너 안 대단히 힙한 사장님이 어리숙하게 파는 옷이기에 특별한 것이다.
역시나 소주 소주 색 티셔츠를 하나 집어 들었다. 테라피 원장님의 말씀대로라면 나에게는 녹색이 힐링 칼라라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유독 소주색 아이템을 많이 가지고 있긴한데... 마찬가지의 이유로 이번에도 내 끌림의 끝에는 소주색이 있었으니,ㅋㅋㅋ 소주색 요다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소주의 보색 형광빛 주황색 박시한 티셔츠도 하나. 색이 주는 강렬함이 나의 나약함을 꽤나 근사하게 가려줄 것 같아서. 그리고 원색의 찐함을 애정한다. 나의 나약하고 샤이한 면모를 촘촘히 감춰주기에 그만이다.
2019년 8월 31일, 9월 1일의 기억
이곳, 여기, 제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