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nes own Seoul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리면

미확인 발사체와 넷플릭스 서바이벌

by 한량

잠결에 무슨 소리를 들었다.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웅얼웅얼 그러나 확성기가 분명한 소리도 들렸다. 그렇게 잠이 깨고 말았다. 알람이 울리는 오전 6시 40분보다 이른 시각이었으므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꼬마가 깼다면 낭패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서 꼬마를 깨워야 하므로. 꼬마가 먼저 깨면 출근 준비 전반에 차질이 생기므로.


울리는 알람에 핸드폰을 보니 경계경보를 알리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지금 대피하라고? 무슨 일이야? 모두가 그랬듯 네이버를 찾았고 연결이 원활하지 않자 당황한 마음이 들었다. 달과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일단 씻기 시작했다. 나는 손톱도 깎았다.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지만 긴 손톱은 분명 거추장스러울 테니까. 소식이 연결된 것은 친구들 대화방이었다. 다들 같은 마음으로 당황해하고 있었다. 우리의 화두는 하나, 출근해? 말아? 였다. '몰라, 난 일단 썬크림 바르곤 있어.' 메시지를 써놓고 거울을 보니 정확히 얼굴의 반만 바른 그래서 양면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이 서 있었다. 피카소 그림 같은 얼굴로 부장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그 와중에 멘트는 또 고심해서 골랐다. '부장님, 많이 당황하셨죠? 저희 오늘 출근하나요?' 곧이어 답장이 왔다.


'아직 전달받은 것은 없네요. 전 지금 안 나가면 지각이라 일단 나갑니다. 전달사항 오면 연락드릴게요.'


그래서 나도 체념하고 얼굴의 반을 마저 메꿨다. 자는 꼬마의 옷도 갈아입혔다. 미사일이 상공을 날아다니고 대피하라는 경보가 울려도 어쨌든 출근은 하고 본다. 등원도 하고 본다. 그것은 K-직장인, K-어린이의 삶. 얼마 후, 이 모든 것이 아찔한 해프닝이었단 소식에 친구들 대화방에선 욕이 난무했다. 어쨌든 출근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출근을 하게 되어 모두 성질이 났다. 그나마 진짜 미사일을 쏜다면 가족들 다 같이 있을 때 쏴 주길. 그래야 대피든 뭐든 같이 할 수 있을 테니까. 그건 맞는 말이었다. 비상 상황에서 꼬마를 데리러 가기 위해선 한강 다리를 건너야 하고, 무사히 만난다 하여도 다시 다리를 건너야 집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잖은가, 전시 상황에서 한강 다리는 꽤 위험하다는 사실을.


연휴 끝자락에 나는 그만 실수를 저지른다. 무심하고 방만한 자세로 넷플릭스 프로그램 <사이렌>을 시작하게 된 거다. 외딴섬에서 펼쳐지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그 첫 화는 6개의 팀, 24명의 참가자들 소개였다. 운동선수, 소방대원, 경찰, 군인, 경호, 스턴트 직업인들이 나와 담담히 웃으며 자신들의 일과, 어떤 결심으로 참가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직 아무런 갈등도 반목도, 배신도 협잡도 등장하지 않았는데 나는 화면 속으로 빨려 들었다. 그 어떤 희생도 우정도 의리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울고 말았다. 이렇게 누수가 잦다니, 하며 눈가를 쓱 훔쳤다. 그리고 시간 단위로 남은 연휴를 불태웠다. 운동하겠다고 나가선 거북목이 되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다음 날 출근을 우려하면서도 밤을 지새웠다. 거기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룰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6개의 팀은 자신의 기지를 지키며 동시에 다른 팀의 기지를 탈취해야 한다. 모든 기지를 점령하는 팀이 승자가 된다. 팀원 각자의 등엔 목숨과도 같은 깃발이 꽂혀있다. 깃발을 뺏기는 순간 전투에서 제외된다. 당연히 근접전, 몸싸움이 일어난다. 기지전은 언제 발발할지 모른다. 섬 전체에 퍼지는 사이렌이 울리면 그 즉시 시작이다. 상대의 기지, 전력, 전략 등을 파악하기 위한 탐색전은 늘 이뤄진다. 그에 맞춰 우리 팀의 전략(공격과 수비의 분배, 어드밴티지의 활용, 팀 간 연합의 여부)도 수시로 수정해야 한다. 팀별 특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흥미로웠다. 경찰은 수사한다. 군인은 매복한다. 경호는 연합을 활용한다. 스턴트는 덤벼든다. 소방은 돌격한다. 운동은 운동한다. 진짜로 그렇게 한다.


유리창은 깨지고 문은 부서진다. 진흙탕을 구르고 연막탄을 던진다. 힘찬 도끼질과 거듭되는 삽질, 이는 은유가 아니다. 나무를 기어오르고 맨손으로 벽을 탄다. 그러다 불을 피워 감자를 삶고 밥을 볶는다. 우리 팀이 최고야, 서로를 북돋으며 잠을 청한다. 언제라도 튀어나갈 수 있도록 완전 무장한 채로. 각기 다른 전략과 술수를 사용하지만 모두의 공통점이 있었다. 명예를 향한 기개. 그들은 줄곧 명예를 얘기했다. 눈빛은 당당하고 자세엔 포부가 넘쳤다. 우리가 해낼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하다란 자신감은 허세가 아니었다. 이 세계관의 최강자는 우리, 바로 나라는 그 기개.


직장인 1n차, 나에겐 명예도 없고 기개도 없다. 긴급 대피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도 맞서 싸운다거나 무엇을 지킬 용기도 없다. 아주 오래된 화두, '아, 그래서 출근하라는 건가요?' 만 남아있을 뿐. 그래서 맨송맨송한 얼굴로 씩 웃으며 '다 죽여버려야지.' 같은 멘트를 날리는 그들에게 몹시 매료되었다. 정말 종말이 도래하는 그날에 그들은 그런 명예와 기개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도끼를 가볍게 들고 비 내리는 산길을 주파하는 그들. 그걸 방구석에 앉아 눈물 훔치며 보는 나. 다음 날 출근까지 남은 시각을 세다 한숨 쉬며 다음 화를 이어 보는 나. 그 사이엔 한없는 갭이 있었다.


누군가 먼 옛날 내게 '네겐 지킬 명예와 그걸 해낼 기개가 있어.' 일러주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까? 험하고 거친 이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많은 방법들 중에서 나도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또 다른 그 유니버스에서 알량한 월급, 복잡다단한 삶, 딸린 새끼는 변하지 않을지라도 위기에 대응하며 헤쳐나가는 전략은 조금 더 다양해지지 않았을까. 무수한 밤, 어두운 골목길, 때론 이른 아침의 대로변. 함부로 몸을 움켜쥐거나 뒤를 밟아오는 사람 앞에서 몸이 굳던 날들. 피하고 숨기보다 여차하면 나는 널 죽일 수 있어, 라는 극도의 포부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주섬주섬 아령을 들어 올리고 다리를 찢으며 <사이렌>을 본다. 차오르는 눈물을 훔치며 이 정도 거북목이면 정찰은 잘 하겠다, 깊이 반성하면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책은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