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nes own Seoul

책은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가 (2)

나의 레몬오렌지 아니 그냥 레몬 나무

by 한량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문 앞에 약간 부담스럽게 생긴 상자가 놓여있다. 상자를 조심스레 뜯으니 신문지로 그러나 꼼꼼하게 포장된 나무가 보인다. '흙도 쏟아지지 않은 채 배송되었어요!'란 후기는 과연 맞는 말이었다. 조심히 들고 들어와 베란다로 옮긴다. 나무는 제법 키가 컸다. 화분 중간에 꽂힌 지지대를 넘어 훌쩍 솟은 나무. 마감이 허술한 플라스틱 화분은 버리고 바로 큰 화분에 옮기기로 한다. 김장용 비닐매트, 삽, 흙, 마사토, 자갈을 착착 꺼내 베란다에 펼쳐놓는다.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꼬마의 귀가 전 이걸 끝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작업 도중 꼬마가 들이닥친다면 계속 날아드는 질문과 나도 해 볼래를 넘어 내가 할 거야! 에 이르는 고집에 대응해야 하기 하므로.


'엄마'도 아닌 '음마'. 그것도 침을 줄줄 흘리며 포동포동한 손을 허우적대던 아기는 이제 간 곳 없다. 잡히는 것은 모조리 입에 가져다대던 시절은 흘러갔다. 분갈이 관람엔 그것도 위험하겠지만 이젠 뻗대고 드러눕는 것도 지나 마음이 상하면 위험한 것을 만지겠다고 협박 같은 선포를 한다. '나 가위 만질거야!', '나 뾰족한 것 만질거야!'. 그건 벌써 금기에 맞설 줄 안다는 것이자, 날카롭고 뾰족한 것보다 더 무서운 엄마의 발언에 저항하겠다는 이야기다. 아무렴, 아니될 소리다. 내 손은 더더욱 민첩하게 움직인다. 풋풋한 상념은 뒤로 하고 재빨리 움직인 덕에 금세 분갈이를 마친다.

남은 흙과 작업 도구들의 정리를 마치고서야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나무를 바라본다. 그냥 나무 아니고 레몬 나무, 그냥 레몬 나무 아니고 이제 나의 레몬 나무다. 새 흙에 뿌리가 잘 정착하도록 물을 조금만 주기로 한다. 조심스레 물을 주니 다행히 물구멍으로 졸졸졸 잘 흘러나온다. 제일 밑칸에 덥석덥석 자갈을 뿌려둔 결과다. 나무는 기특하게도 몇 개의 꽃을 달고 있다. 꽃은 하얀색, 수술은 연한 노란색이다. 그리고 더욱 감동스럽게도 아주 작은 레몬 하나도 달고 있다. 블루베리만큼 작은 크기의 초록색 레몬. 그러나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모양과 거친 표면은 몹시도 레몬답다. 향이 날까? 싶어 코를 들이밀어보지만 거기에선 향이 나지 않는다. 은은한 아주 은근한 향은 잎에서 나고 있다.


함께 도착한 식물등의 설치까지 마치고나니 과연 베란다 전체가 눈부시다. 레몬나무뿐 아니라 함께 있는 화분들도 좋아할 것만 같다. 그러나 바라보는 내 눈도 얼마간 부신다. 뭔가가 더 있어야 한다. 그래, 전등갓이 필요하다. 생각은 바로 서랍장 깊숙히 잠들어 있는 라탄재료에 닿는다. 좋아, 그럼 전등갓을 만들어야겠다. <정원사의 열두 달>에서 시작된 레몬 나무 키우기는 이제 여기까지 이른다. 그리하여 꼬마가 잠든 밤, 식탁 가득 라탄환심과 분무기, 송곳과 니퍼를 부려놓고 꼬물꼬물 손을 접었다 편다. 예전에도 생각했었다. 식물 가득한 풍경을 두고 이렇게 라탄을 매만지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그건 상상하기에 참 싱그럽고 우아하지만 손으로 만드는 작업들이 그러하듯 목과 어깨가 굽어가는 지름길이다. 뜨개질이 그랬고 레고조립이 그랬고 그림그리기가 그랬다. 몰두의 정도에 비례해 점점 굽어가는 몸. 이쯤에서 어깨를 펴고 스트레칭이라도 한번 해야하는 걸 아는데, 이 단계까지만 이 다음 단계까지만 하다 결국 다 마치고서야 끙차! 일어서게 되는 마음도. 그러는 사이 점점 그럴싸한 전등갓 모양이 되어간다.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다. 마지막 사릿대를 감은 뒤 날대를 접어 끼우면 된다. 그릇이나 채반을 만들 땐 안과 밖 모두 매끄럽도록 만들어야 했는데, 이건 전등갓이니 갓의 안쪽 면 마감은 바깥보다 수월하다. 그 말은 곧 날대를 안쪽으로 대강 끼워놓으면 된다는 이야기다.

짜잔! 완성한 전등갓을 서둘러 전등에 끼우려는데 입구가 조금 좁다. 잠시 탄식과 함께 천장을 올려다 본다. 덕분에 뒷목을 잠깐 풀고서 라탄의 탄성과 내 손의 악력을 믿기로 한다. 그렇게 어렵사리 욱여넣어보니 전선 방향을 반대로 끼웠다. 인내의 한숨과 함께 다시 제대로 끼우니 이번엔 길이가 짧다. 생각보다 전구가 컸던 셈이다. 갓이 전구보다 살짝 길게 떨어져야 퍼지는 빛을 부드럽게 감싸줄 텐데 이건 갓이 조금 대롱거리는 모양이다. 다시 제작하기엔 밤이 늦어 이만 자기로 한다. 왜 눈대중도 아닌 마음대중으로 마무리를 했지, 이미 날대를 짧게 잘라 마감한 터라 이어서 만들 수도 없는데, 자책하며 잠에 든다. 그래도 음, 보다 보면 좀 괜찮아질까? 희망도 조금 가져보면서.

다음 날 아침, 간밤의 결과물을 본 달은 말한다. '귀엽다. 머리 싹둑 잘못 자른 사람 같아.' 그 말에 나는 새롭게 다시 만들 것을 결심한다. 다시 만들리라, 이번엔 넉넉하게. 그리고 다시 수정할 수 있도록 마감도 너무 바특하게 않게 만들어야지. 문득 94센티미터의 오스카가 떠오른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던 <양철북>의 오스카. 세 살의 키로 끊임없이 북을 두드리던 오스카. 오스카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나는 다음 날 다시 새로운 작업에 착수한다. 의욕이 과다했던 탓일까, 조금 찌그러져 이젠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형상이 된 것 같았지만 다시금 믿을 것은 라탄의 탄성과 두 손의 악력이다. 구부러진 부분을 펴서 누르고 곧이어 손 쉽게 생각하고 만다. 찌그러진 부분은 벽 쪽으로 돌려놓지 뭐.

드디어 완성된 전등갓, 그리고 돈으로 사들인 햇살. 레몬 나무. 바라던 그림이 완성되었다. 정원사의 손쉬운 착각답게 며칠 만에 레몬 나무는 조금 더 푸르러진 것 같다. 앙증맞은 레몬은 몸을 더 키웠다. 이것은 착각이 아닌 진실이다. 매일 아침 기상과 함께 식물등을 켜 주고, 밤이 되면 끈다. 사이사이 베란다에 나가 관찰한다.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꽃은 가볍게 건드려주고, 새로 돋아나는 잎은 부드럽게 쓸어본다. 그러면 은은한 레몬향이 번진다. 나는 레몬 나무와 함께 살고 있다. (꼬마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더없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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