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수는 기술 매도는 예술

집이라는 한 글자 (7)

by 한량

투자엔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이 중요하다. (고 한다) 단기적인 등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중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꾸준히 투자해야 한다. (고 한다) 고로 내재적인 가치를 지닌 상품에 투자해야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고 한다) 다 어디선가에서 주워들은 말이고 모두 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비단 투자뿐 아니라 인간관계, 인생설계, 커리어 등의 확장과 향상을 요구하는 일엔 두루 통용되기도 한다. 자신의 중심을 잘 지키며 묵직하고 꾸준하게 나아가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문제는 그게 돈과 직결되었다는 데 있다.


돈만큼 감정을 손쉽게 흔드는 게 또 있을까. 예전엔 돈이 아닌 것들이 내 감정을 쥐고 흔들었다. 날아오르게도 하고 푹 꺼지게도 했다. 희노애락애오욕이 출렁거리는 바다에 마음껏 온몸을 던졌다. 자주 웃고 많이 울었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가운데서도 그게 싫지 않았다. 이제는 그 진폭이 조금 줄어들었다. 대신 돈에 대한 생각이 끼어든다. 자잘한 단위에서부터 큰 덩어리에 이르기까지, 이번 달 카드값에서부터 언젠가 로또 1등이 된다면이라는 망상까지. 어디선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면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말을 보고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내 숙연해졌다. 되게 현실적이고 맞는 말 같아서였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면, 하고 이어질 말을 생각했다. 행복은 도달이 아니라 상태라는데, 만족스러운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선 역시 돈이 필요한 것 같았다. 돈이 가져다주는 상태란 뭘까. 그러자 윤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우리의 유전자 깊은 곳에 빈사에 대한 경계가 있는 만큼 메마르고 푸석한 것은 모자라게 여겨졌다. 또한 21세기의 값싼 풍요는 반대의 관점을 강조했다. 삐쩍 마르진 않되, 지나치게 기름지진 않아야 한다고. 그러니 적정한 윤기가 필요했다. 번지르르 말고 반지르르, 번들번들 말고 반들반들. 여기에 조금의 넉넉함이 깃들어도 좋겠다. 여유, 여력의 앞에 붙는 '남을 여'자처럼. 자고로 곳간에 인심 난다지 않는가. 그러니까 생활 전반에 은은한 윤이 돌며, 여러모로 흡족한 상태, 이게 바로 행복의 지표 아닐까? 그러는 동안


집값은 오르기 시작했다.


깔고 앉은 건 기분만 좋은 게 다지만, 그게 어디냐며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월세나 전세로 살았다면 집값이 오르는 소식에 발만 동동 굴렀을 것이다. 계약갱신권을 쓸까 말까, 그렇게 눌러앉다가 지닌 현금의 가치가 더 쪼그라들지 몰라, 그냥 이 참에 집을 살까? 그럼 어디로? 어떻게? 의논하다 의견이 다른 부분마다 서로를 찔러대며 원망했을 것이다. 타고난 성정이 삐쭉빼쭉한 데다 위기감이 엄습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서로 미워할 일이 없어 다행이긴 했다만 실제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거둘 입이 하나 더 생겼고, 아기를 키우는 동안 나의 수입이 없었다. 게다가 벌여놓은 대출들의 금리는 조금씩 오를 기미였다. 5년 고정금리로 받은 주담대는 든든했으나 덩치가 커 월말이면 숭덩숭덩 통장을 도려냈다.


스파브랜드의 세일 기간엔 시작 시간에 맞춰 알람을 설정했다. 장바구니엔 앞선 계절, 그러나 사실 한 해 묵은 옷들을 미리 담아두었다. 꼬마는 늘 조금 큰 옷을 접어 입고 어린이집에 갔다. 장난감들은 장난감도서관의 대여 서비스를 이용했다. 2주마다 들러 장난감을 반납하고 새로 대여했다. 예약 중이란 포스트잇의 의미를 이해 못 하는 꼬마는 눈앞의 큼지막한 장난감 앞에서 목놓아 울어댔고, 나는 해당 장난감의 최저가를 검색하는 대신 중고거래앱에 들어가 매복했다. 몇 번의 실패도 있었다. 다 낡아빠진 장난감을 무려 만원을 주고 사 오기도 하고, 제목에 낚여 증정용 책을 구입한 적도 있다. 으슥한 밤 낯선 동네에서 서성이며 매도자를 기다리는 매수자의 마음이란 참. 그러기에 친구들이 물려주는 장난감과 전집들이 참으로 요긴했다.


세일에 부지런하며 지역화폐 구입도 놓치지 않으며, 각 카드마다 실적금액을 아슬아슬하게 맞춘다. 그래야 대출 금리 인하 조건을 맞출 수 있으니까. 레시피를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동치미를 파김치를 게장을 담근다. 지역화폐와 온누리 상품권 사용이 가능한 동네 가게를 줄줄 꿴다. 각 가게마다 살만한 품목들도. 가시적인 성취가 없는 육아의 세계에서 나는 줄이고 조이는 성취에 슬그머니 빠져든다. 그러다 가끔 헛웃음이 터져 나올만한 소비-바르셀로나 한 달 살기-를 하기도 하지만. 그러던 중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매수가를 하회할 만큼.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잇단 거래가를 확인하자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겨울이 오는가. 욜로에서 영끌로 전향한지 얼마 되었다고 이렇게 무참한 계절을 맞이하는가. 괜찮다. 계속 눌러앉아 살면 된다. 다시 되새겨 보자. 매수는 기술, 매도는 예술. 나의 기술과 예술은 엇박자의 리듬을 타고 있었다.

이전 06화실거주의 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