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라는 한 글자 (12)
드디어 B 부동산에서도 연락이 왔다. 시간 약속을 정하고 나자 또 마음이 두근거린다. 계획형에 가까운 이들은 알 것이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고 하면 나는 3시에 모든 세팅을 끝내둘 거야'의 결심. 그래서 정작 4시가 다가오면 기진맥진한 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하지만 이제 두 번째 손님의 방문이기에 나는 아직 들떠있었다. 집 보는 약속을 잡는 짧은 전화에서 나는 늘 오실 분의 대략적인 신상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럴 타이밍을 찾지 못한 채 통화가 끝나곤 했다. 혼자인지, 둘인지, 둘 이상인지, 나잇대는 어떠한지, 이 동네를 잘 아는 분인지 등등. 게스트의 프로필과 메시지를 보고 브리핑의 성격을 달리 하던 예전 버릇이 남아있던 탓이다.
전에 만났던 그 사장님 대신 중년의 인상 좋은 아저씨 실장님이 손님을 데리고 왔다. 손님은 젊은 분 혼자였다. 김 사장이 휴가를 가서 허허 하며 들어선 B 실장은 의외로 나와 궁합이 맞았다. 나에게 적절한 발언 기회를 내어주고 자긴 뒤로 물러나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리 셋은 커피를 한 잔씩 나눠 들고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화제는 매끄럽게 이어졌다. 나는 그제야 가족 분들과 함께 사시는 건가요? 하며 마치 이미 이사가 정해진 것처럼 물어보았다. 아뇨, 저 혼자 살려고요. 그래서 나는 보통의 매도자가 하지 않는 일-찬사와 함께 물개박수 치기-을 했다. 어머, 정말요? 진짜 부럽습니다. 와, 그럼 그냥 몸만 들어오시면 됩니다. 찬탄과 너스레 그리고 이상한 부추김을 하는 동안 B 실장은 여전히 허허 웃고 있었다.
왠지 예감이 좋아. 나는 집 밖을 떠돌고 있던 달에게 문자를 보냈다. 꼬마가 집에 있으면 차분하고 우아하게 집을 볼 수 없으니, 손님이 올 때마다 그들은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제 가셨으니 집에 와도 좋다고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A 부동산 사장님이다. 내일 손님을 데려가겠다는 전화다. 음, 이것 참 인기가 좋군. 뭐 우리야 어디라도 좋지. 하며 으쓱거리던 저녁. 그런데 아까 보고 간 손님이 집을 구매하고 싶단 연락을 했다며 B 부동산에서도 전화가 왔다. 아니 벌써? 집 내놓은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이건 첫 번째 오퍼다. 잔금 날짜와 이사 일정도 다 맞춰주겠다는 좋은 조건. 그런데 가격은 우리의 호가보다 2천만원 싼 그런 오퍼.
여기서 우린 잠시 갈등한다. 조건과 타이밍은 좋은데 2천만원 싸게 바로 파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게다가 내일 또 보러 오겠다는 손님도 있잖아? 이게 초심자의 행운인지 아니면 시장의 적절한 콜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일단 내일까지 생각해 보겠다고 마음을 정한다. 내일 오는 손님이 호가에 맞춰 구매하겠다고 할 수도 있잖아. 아니라면 B 손님이랑 다시 협상을 해 봐도 좋지. 어깨에 힘이 안 들어갔다면 거짓말이다. 이불 안에서 쿡쿡 웃으며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약속 시간 한 시간 전. 역시 집은 모든 세팅을 마친 상황이다. 여전히 긴장은 가시지 않는다. 남은 분을 헤아리다 예민해진 나는 블럭을 맞춰 터뜨리는 단순한 게임을 켠다. 인정사정없이 깨부수고 있는데, 약속시간을 4분 남기고 A 사장님의 전화가 온다. 손님들 내비게이션 도착 시간이 20분 뒤라고 전화가 왔다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하, 평정심을 잃은 탓에 게임도 내리 망치고 만다. 초조함에 기분이 좋지 않다. 결국 그들은 약속시간에서 40여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도착한다. 마음속으론 이미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지만, 일단 보여주기로 한 것도 약속이니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는다. 들어선 것은 사장님 그리고 손님 셋이다. 손님 셋은 모두 맨발이다.
물론 계절은 여름, 편한 신발을 신고 오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나는 집을 보러 갈 때 늘 양말을 챙겨신곤 했다. 앞이 막힌 신발이 아닐 때면 미리 덧버선을 가져가 현관에서 신은 다음 들어서곤 했다. 뭐랄까, 반만년 댓돌에 신발 벗어두던 민족으로서 맨발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게 타인의 발에 대한 터부라고 하기엔 또 애매한 게, 이제껏 나는 손님들이 들어오고 그들이 엉거주춤 집을 둘러보는 사이 신발코를 거꾸로 돌려놓곤 했다. 나갈 때 쉽게 신고 나갈 수 있게, 그래서 배웅이 매끄럽게 마무리되도록. 그런 게 나의 은은한 서비스였다. 쓰다 보니 깨닫는다. 나는 민감하다. 나는 예의와 매너를 중요하게 여긴다. 나는 작은 부분에서 까다롭다. 나의 허들은 높다.
그 허들을 마구 뛰어넘는 손님 셋에 잠깐 아연실색한다. 이제껏 손님들은 부동산 사장님을 따라 일련의 동선대로 움직였다. '여기를 보시죠.' 하면 가리키는 곳을 보고, '방으로 가 볼까요?' 하면 따라가곤 했다. 대체로 그런 편이었다. 그런데 이분들은 그런 게 없었다. 누구는 방을 보고 있고 누구는 화장실 불을 켠다. 다른 누구는 다용도실 문을 열고 덥썩 들어가고 있다. A 사장님도 당황한 눈치다. 나는 누구를 마킹해야 하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러다가도 질문이 생기면 내 코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묻는다. '그런데 왜 이사가세요? 어디로 가세요? 어떤 일 하세요?' 이런 질문이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침을 튀기며 날아온다. 아무래도 아까의 판단은 실수였다. 이건 가석방 없는 징역 10년이다. 나는 판사봉을 탕탕 내려친다.
하지만 그냥 나가달라고는 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이분들이 집을 산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네고' 없이 '쿨거래'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비틀대는 몸을 의자에 기대며 숨을 돌린다. 시끌벅적한 탐색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를 찰나, A 사장님이 은근히 밀어붙여온다. 빨리 결정하셔야 한다고, 다른 팀들도 탐내고 있는 집이라고. 셋은 능청스럽게 빠져나간다. 지금 다음 볼 집 약속도 잡혀있다고. 거기까진 가서 보고 결정을 내리겠다고. 아무래도 좋다. 일단 그들이 어서 나갔으면 한다. 그 와중에 용케 다 비운 커피컵들을 치우며 나는 한숨을 쉰다. 저녁, A 사장님의 전화가 온다. 침대 놓을 자리가 조금 애매하다며 안 사겠다고 연락이 왔다 한다. 으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하지만 B 손님을 잡아야 할지 말 지 고민되는 상황.
B 손님은 처음 제시한 금액 이상을 낼 순 없다고 한다. 우리가 저울질하느라 응답을 지체한 사이 마음이 식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거래는 성사되지 않는다. 우리가 욕심부리다 귀한 손님을 놓친 걸까? 하지만 첫 오퍼에 순순히 응하기엔 조금 아쉽지 않을까? 그럼 어느 선이면 적정한 걸까? 지금 시장은 어떤 분위기일까? 매수자 우위? 매도자 우위? 매 순간 갈팡질팡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매물을 내놓지 않았던 C 부동산에서 이상한 경로를 타고 연락이 왔다. 어느 사모님이 이 집에 큰 관심을 보이며 꼭 한 번 보고 싶어한다는 그런 연락이었다. 하아, 이번엔 사모님, 사모님이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