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과의 커피 한 잔, 아니 커피 두 잔

집이라는 한 글자 (13)

by 한량

이 세계에서 웬만한 사람에겐 사모님, 사장님이란 지칭이 붙는 모양이었다. 누구 씨나 누구 님하며 이름을 공개하기엔 아직 서먹한 사이끼리 부를 말이 없어 그런지도 몰랐다. 거기엔 적당한 존중과 적절한 거리가 담겨있으니까. 그리고 희미한 돈 냄새도. 그런데 전화로 들은 내용으론 이 사모님의 돈 냄새는 꽤 강렬한 듯 보였다. 사연인즉 혹시 매도에 도움이 될까 싶어 공들여 쓴 집을 소개하는 글이 포털사이트의 부동산 섹션에 올랐고(나는 올라간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 글을 읽은 '사모님'이 평소 안면이 있던 C 부동산에 연락을 해 왔다고 한다. C 부동산 사장님은 그 길로 나를 수소문해 찾아낸 것이고.


아, 집 보실 수 있어요. 라고 답하니 그 사모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투자용으로 매물을 살피고 있는 분이라 돈 걱정은 없다고. 들어와 살 것도 아니니 이사 조건도 다 맞춰주실 거라고. 가격만 맞으면 집 본 날 바로 살 수도 있다고. 음, 그렇군요. 그렇게 약속 시간에 맞춰 C 사장님과 사모님이 집에 도착했다. 수더분한 인상의 사장님, 그리고 단정한 원피스와 니트 벙거지 차림의 사모님은 천천히 집을 둘러보며 칭찬을 늘어놓는다.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다. 나는 적절한 타이밍에 커피를 내어놓고 식탁에 앉을 것을 청해 본다. 그리고 우리는 긴 수다를 떤다. 이야기는 곧 제대할 아들 이야기(카투사 복무였다), 결혼한 딸 이야기(손주는 아직 없다) 등까지 나아간다. 적당한 맞장구와 가벼운 웃음, 얼음은 녹고 잔은 비어간다. 나는 커피를 더 따른다.


하지만 우리가 모인 본분은 셋 다 잊지 않는다. 이 동네의 집을 찾는 이유는 아들이 여기에 살았기 때문이고, 딸은 넓은 평수로 이사가고나서 로봇청소기 없으면 못 산다고 한다. 지금 집을 사서 월세로 놓을 예정이고 나중에 아들 장가가면 신혼집으로 줄까 생각한다는, 이 정도면 젊은 사람들 살기에 괜찮지란 평도 이어진다. 은은한 자식 흉과 은근한 돈자랑도 계속된다. C 사장님은 적절하게 비위를 맞춰주다가 조심스레 매매가격을 떠본다. 사모님은 때를 놓치지 않고 가져온 가방을 톡톡 두드린다. '나 마음에 들면 바로 계약서 쓰려고 인감까지 들고 왔어요. 지금 다른 곳 봐둔 물건도 있는데 거긴 짐이 너무 많아서 구조를 잘 볼 수가 없더라고. 가격만 괜찮으면 바로 사고 싶은데.' 이제는 내가 말할 차례다.


며칠 전 오신 분이 얼마까지 부르셨는데, 저희가 그 가격엔 안 판다고 말씀드렸어요.


별다른 첨언 없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하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나는 원래 거래에 약한데, 흥정엔 더 약하고. 그런 내가 어디에도 집이 있고 어디에도 집이 있으며, 창밖 풍경을 칭찬하는 C 사장님에게 '에이, 우리 집 조경은 여기보단 더 낫지.' 라고 말하는 사모님 앞에서 떨지 않고 편안한 응대를 하고 있다. 불발되긴 했으나 엄연히 존재했던 오퍼가 나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 더불어 처음 만난 사이에 자식 자랑, 돈 자랑 하는 상대가 너무 얕아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야기 없었으면 각자 생각하는 금액을 이야기해 보자며 물꼬라도 텄을 텐데. 내 대답을 듣자 사모님의 표정은 싹 바뀐다. 판단이 빠르고 행동은 더 빠른 사모님은 인감도장이 들었다는 가방을 들고 일어날 채비를 한다. 환담의 자리는 막을 내린다.


나는 웃으며 배웅을 한다.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손님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사실이니까. 우리가 원하는 가격이 시장가보다 높은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인연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렇게 협상 테이블에 앉아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고 내 깜냥도 알아가며, 밀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는 경험이 새로웠다. 상대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면 단박에 겁을 집어먹고 가진 패를 다 보여주던, 그것도 우당탕탕 넘어지느라 손에 쥔 카드를 죄다 흩뿌리던 때는 지난 것 같았다. 배짱이라면 배짱이란 것도 조금 생겨난 듯했다.

국제 경제와 금리, 매파와 비둘기파, 통화량, 환율, 세율, 각종 정책 같은 거시 경제에서 이 좁은 식탁 위의 커피 한 잔. 아니 커피 두 잔의 줄다리기까지. 어느새 나는 미시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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