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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Aug 12. 2024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스위스 로잔 편

루시드폴과 서영춘을 벗삼아

로잔까지의 거리는 525km. 하루 만에 주파할 계획이다. 야심차게 떠나는 길, 차 트렁크엔 여행을 위한 짐이 한가득이다. 세 식구 입을 옷, 세면도구, 수영복을 비롯해 컵라면과 물도 부족하지 않게 챙겼다. 여흥을 위한 도구도 필요하다. 전자책과 아이패드, 꼬마의 자전거와 헬멧도 싣는다. 거기에 두꺼운 요가매트도 둘둘 말아 올린다.  이제 트렁크엔 남은 자리가 거의 없다. 뒷좌석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출발한다.


무릇 여행엔 이를 관통하는 음악이 있기 마련이다. 여행 내내 즐겨 들어 나중엔 전주만 들어도 지난 추억이 떠오르는. 로잔에 가는 만큼 당연히 <국경의 밤>을 들을 생각이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꼬마가 차만 타면 특정 노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렛잇고에 이어 새롭게 빠져든 노래는 바로 <서울구경>.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에'로 시작하는 바로 그 노래다. 기차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 자식이 철덕이라니)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리로 인도할 줄은 몰랐다. 구성진 가락과 재간 넘치는 가사에 꼬마는 잔뜩 매료되었다. 가사의 뜻을 물어가며 듣고 또 듣더니 드디어 노래 전체를 외우기 시작했다. '차표 파는 아가씨와 실갱이하네', '아,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시골영감의 앙탈이 여행길 내내 차고 넘친다.


협상 끝에 겨우 3회의 재생권을 획득한 나. 허겁지겁 <국경의 밤>을 듣기 시작한다. 호젓한 피아노에 맑고 여린 목소리는 '500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혹은 '회전교차로에서 다섯 번째 출구입니다' 같은 음성에 자꾸 흐려진다. 귀를 더욱 쫑긋 세우고 표지판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목적지인 로잔연방공과대학교, 이미 우린 캠퍼스 안이다. 알프스와 레만 호, 그와 마주한 캠퍼스. 햇살은 호수 위로 부서지고 바람은 선선하다. 바다만큼 드넓은 호수지만 짠 기운은 없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조깅을 하는 사람들. 호수 위론 요트와 하늘엔 패러글라이딩. 로잔의 올림픽 위원회를 떠올리고선 나는 손쉽게 도시를 재구성한다. 지성과 육체의 조화. 물론 거기에 기타를 하나 얹은.

폴의 흔적을 따라 캠퍼스 안을 거닌다. 롤렉스 이름이 붙은 도서관은 세련되고 멀끔해서 (프릿츠 한센의 조명과 가구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가 졸업한 후 지어진 곳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 아름다운 도서관 마당에서 나의 귀는 귀신 같이 모국어를 잡아낸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학생 둘. 그분들 덕에 이곳이 폴의 모교가 맞음을 확인한다. 우리의 수줍은 질문에 답하길 "네, 저 산 보고 기타 치고 그랬겠지요." 그렇다. 관악에 이어 알프스를 바라보며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했겠지. 국경을 따라 달리며 친구를 위로하고, 어린 시절을 떠올렸겠지. 나도 국경을 따라 달리며 가냘픈 목소리에 위로를 받는다. 한편으론 자꾸 반복 재생되는 가사를 지우려 노력하며. '영감님이 깜짝 놀라 돈을 다 내며/깎지 않고 돈 다 낼 테니 나 좀 태워다주'.


여행의 목적을 소기에 달성했으므로 이후의 일정들은 편안했다. 달과 함께한 여행 중 처음으로 나는 총괄지휘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선택지를 두고 묻는 질문엔 답을 했으나 대화는 '사실 어떤 걸 선택해도 좋아'로 끝났다.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많이 먹으면 좋겠어' 정도가 제일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그냥 달이 가자는 곳으로, 하자는 걸 따라갔다. 그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여행 계획을 짰으나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내일 묵을 호텔을 예약하고 있었다. 그다음엔 목적지인 도시로 향하는 길에 그날 묵을 호텔을 예약했다) 그래도 대체로 순조로웠다. 장거리 자동차 여행도 처음, 음악 취향을 포함해 자기주장 확실한 게스트와도 처음이었지만 모두의 만족도가 높았다. 이 기회를 빌어 시골영감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스위스 두 번 가 본 사람과는 꼭 친하게 지내라고, 한 번은 모르고 가도 두 번 갔다는 건 그만큼 부자라는 거라고. 비싼 스위스 물가에 우린 위축되었으나 (쌀국수 한 그릇에 29프랑, 오늘 환율로 45,800원이다. 디저트로 먹은 조그만 아이스크림 하나에 6프랑, 제가 먹자고 골라놓고 반은 남겨서 달이 싹싹 긁어먹었다) 공공 수영장만큼은 확실히 저렴했다. 하루 종일 노는 데에 6프랑. 아이는 무료. 그런데 축구장 반만 한 잔디가 펼쳐져 있고, 수영장 너머로 호수가 넘실거리는. 그 뒤로 병풍 같은 알프스 산맥이 펼쳐져있다. 알맞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는다. 물은 차갑지만 해가 쨍쨍해 몸을 담글 만하다. 달과 꼬마가 물속에 있는 사이 나는 돗자리 위에서 요가를 시작한다. 전굴도 측굴도 나비자세도 박쥐자세도 좋다. 이것이 햇살 파워일까.

로잔에서 하루 묵고 이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갈 참이다. 제법 날렵하게 짐을 꾸려 다시 트렁크 테트리스에 임한다. 어제 보고 경탄한 그 산을 넘어야 한다. 절경 다음에 다시 절경이 이어진다. 어쩜 저리 높을까, 어쩜 이리도 아름다울까. 뾰족한 암벽과 그 위에 앉은 눈을 본다. 뒷자리의 꼬마는 설산이란 단어를 배운다. 비탈진 언덕엔 소들이 위태로이 서 있고, 그림 같은 샬레가 뚝뚝 놓여있다. 매일 이런 걸 보고 자라면 세상 어디를 가도 아무 감흥이 없을 것 같아. 하늘은 푸르고, 산은 파랗고, 호수는 청록색에다 집은 엽서 속 그림 같은. 때아닌 스위스 청소년들 걱정까지 하며 산을 넘고 넘는다. Ausfahrt, Sortie, Uscita. 어느새 표지판은 독일어에서 불어, 다시 이탈리아어로 바뀐다. 이제 두 번째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로 향한다. 오늘밤은 제노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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