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보내는 편지
얼마 전 생일을 맞았다. 핸드폰에선 알림음이 여러 번 울렸다. 몇 년 전 머리를 했던 미용실에서도, 더 먼 옛날 들렀던 안경점에서도 생일을 축하한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들의 정성스러운 고객 관리에 놀라기도 하고, 수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개인 정보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것만이었다면 조금 슬펐을 테지만, 다행히 다른 메시지들도 도착했다. 친구들이 보내는 메시지였다.
만나서 시간을 보내고 얼굴 보며 안부를 물을 수 없는 연말, 우리의 인사는 좀 더 끈끈해졌다. 다음에 한번 만나자, 밥이나 먹자, 너네 동네 갈 때 연락할게. 이렇게 스스럼없이 나누던 말들을 그리워하며 생일 축하와 연말 인사들을 나누었다. 물론 비대면 축하에 가장 쾌재를 부르는 이는 따로 있었다. 그건 선물하기 기능을 가진 메신저 회사였다. 배송지를 입력하라는 질문이 연이어 당도했고 그때마다 나는 허둥지둥 주소를 입력했다. 여행으로 잠시 집을 비운 것을 까먹고서였다.
그리하여 한파 특보가 내린 세밑의 귀갓길, 많고 많은 택배 박스를 치워놓고서야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창문을 모조리 열어 환기를 시킨 다음 보일러를 켰다. 몇 날 며칠 묵은 빨래들을 여러 번 돌리고, 동시에 '목욕-우유-놀기-잠'으로 이어지는 아기의 저녁 일과도 무사히 수행했다. 그제서야 바닥에 온기가 도는 듯했다. 공기도 차차 훈훈해지고 있다. 이제 한숨 돌릴 만하다. 그래서 나는 문구용 가위를 들고 택배 박스 뜯기에 돌입한다. 사랑은 택배로, 우정도 택배로.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생각하며 선물들을 하나씩 꺼내본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바디워시와 바디로션, 바디크림과 샤워젤, 헤어 퍼퓸과 핸드크림 등. 다들 씻고 바르고 향을 내는 것들이다. 나는 잠시 자문해 본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조금 더 잘 씻으라는.. 그런 뜻이니? 너희들?
수납장에 넣어 놓고 나니 가히 몇 년은 쓸 양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그중 하나를 골라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물이 나오도록 레버를 돌려놓고 씻을 준비를 한다. 바쁘게 흐른 하루였다. 강추위를 돌파하며 귀가했다. 가득 찬 두 개의 캐리어를 다 정리해 비웠다. 세탁기에선 두 번째 빨래가 돌아가고 있다. 저녁을 어설프게 때우긴 했지만 별 탈 없이 아기를 재웠다. 그럼 다 된 거다. 안도하는 마음으로 샤워기를 들어 머리부터 적신다. 체온보다 조금 높은 물이 몸을 타고 흘러내린다. 부스 안엔 서서히 김이 서린다.
소설에서나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나, 나는 언제나 지치고 남루한 몸이 물에 적셔드는 장면을 좋아했다. <더 로드>, <매드맥스> 같은 황야의 배경에서 물을 만나는 장면은 경건하게까지 느껴졌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서 구멍난 철조망으로 빠져나간 죄수들은 허술한 보안에 어리둥절해한다. 저 밖에 나가도 되나? 이러다 모두 독방에 가게 될 거야! 고민하다가도 눈앞의 호수에 첨벙첨벙 들어가 물장구를 친다.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웃고 머리 끝까지 푹 담그며 기뻐한다. 그래서 이건 심각한 탈옥 대신 의외의 소풍이 되어버린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울었다. '죄를 씻는다'는 수사는 늘 내 마음에 그늘과 볕을 동시에 드리운다. 때에 전 몸은 말갛게 헹궈진다. 흐린 마음은 하얗게 씻어진다. 죄도 대상도 아닌 어떤 몸들은 물 아래서 더욱 자유롭다. 모두의 호흡기를 위협하는 역병의 시대 이전, 나는 따뜻한 물 가득한 목욕탕에서의 추억을 생각한다. 평가하고 재단하는 시선 없는 그곳에서 우리의 몸은 함부로 퍼질러져도 좋았다. 두툼하고 너른 허벅지와 튼실한 엉덩이, 이리저리 포갠 다리를 보면 해변에서 볕을 즐기는 바다사자들이 떠올랐다. 습한 공기 사이로 가슴팍엔 땀이 흐르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하얗게 불었다. 달아서 머리가 쨍하게 울리는 커피를 쪽쪽 빨면서 기세 좋게 땀을 내던 시절, 척척 몸을 뒤집으며 때를 밀던 시절, 지친 몸을 북돋우던 시절.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샥샥 바르던 기억. 그 때를 그리워하며 몸을 적셨다. 선물 받은 바디워시에선 낯선 향이 났고 그건 한결 어른의 향기 같았다. 그렇게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열흘 만에 두 살 먹는, 언제나 배부른 12월이었다.
'바르셀로나와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는 바르셀로나의 박민아 님과 함께 2022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도시에서 8시간의 시차를 공유하며 한 달에 두 번 같은 주제로 에세이를 씁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알지 못하나 우리는 정말 즐거운 기대를 안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꾸준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써 보겠습니다.
"feliz año nuevo,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