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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Mar 17. 2022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

병원 진료실에선 언제나 조금 긴장하게 된다. 그것도 진료 의자가 아니라 침대에 누웠을 때는 더욱 그렇다. 간호사는 어색한 나무둥치처럼 누운 나의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준다. 쿠션 하나를 왼쪽 등 아래에 넣어 몸이 비스듬히 기울도록 만든다. 미리 갈아입으라 한 가운의 앞섶을 젖힌 다음 내가 여러모로 황망해하거나 어색해하지 않도록 수건을 덮어준다. 그리곤 낮은 조도의 조명마저 꺼 사방이 컴컴하도록 만든다. 창가엔 두터운 암막 커튼이 드리워있다. 머리 위 모니터의 화면만 빛을 발하고 있다.


준비 다 되었습니다.


잠시  의사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 팔을 위로  뻗으세요. 말하며 왼쪽 가슴을 덮고 있던 수건을 걷는다. 그러곤 튜브를 들어 푸슈슉 젤을 뿌린다. 퓨쉬육  . 태국 음식의 이름 같은 소리가 들린다. 생각해 보면 거의 모든 초음파실이 그랬다. 언제나 튜브는  이상 비어있고, 그래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젤이 후두둑 튄다.  다시금 흔들어 짜도록 설계된 것처럼. 다행히 여기 병원의 젤은 튀긴 튀되 온도는 적당히 미지근했다. 그것만 해도 어디냐 싶었다.


탐촉자가 가슴 위로 천천히 미끄러진다. 나는 굳이 고개를 뒤로 젖혀 모니터의 상을 바라본다. 보면 뭐라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눈을 떼지 못하나 그곳엔 흑백의 음영만 가득하다. 위와 아래, 오른편과 왼편을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계속 쳐다보게 된다. 저게 내 가슴의 단면일까? 지구과학 시간에 본 지층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겹겹이 늘어선 밭이랑과 고랑 같은 선들은 지리부도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동시에 탐촉자의 움직임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일 때는 비교적 평정심이 유지되지만 한 자리에 멈추었거나 이미 지나온 자리에 다시 되돌아가 잠시 살펴볼 때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미 가운 밖으로 나 몰라라 꺼내 두었음에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열한 시, 영 쩜 육. 네시 반, 으흠, 영 쩜 육.


밭이랑과 고랑 사이 검고 둥근 원이 보인다. 한 끝에 커서를 고정하고 끝을 늘려 지름을 재는 모양이다. 시간은 아마도 시계 방향으로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대체 무엇의 크기와 위치를 재는가. 내 가슴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이 담겨있기에.

 

이제 다 끝난 것일까. 커다란 키친타올 같은 종이를 왼쪽 가슴에 덮어주며 의사 선생님이 작게 속삭인다. 나쁜 것 없어요. 그 한 마디에 내 마음은 그저 찻잔 속 설탕처럼 녹아내린다. 나쁜 것이 없는 가슴엔 그럼 무엇이 있는가. 크기도 모양도 나쁘지 않은 그저 평범한 것들이 있다고 한다. 절로 사라지거나 줄어들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떼어내 검사해 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앞으로 종종 검사를 하며 관찰해 보면 된다고. 미끄덩한 초음파 젤을 닦아내고 허술한 노란색의 가운을 여미며 나는 고개를 숙인다. 감사하다고, 말한다.


나, 여기 있어요!


마치 손을 들어 반갑게 흔드는 것처럼, 몸 안의 무엇들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잊고 살던 존재들을 느끼곤 한다. 몇 개월 전부터 자궁이 그런 인기척을 내다 잠잠해지더니, 얼마 전부턴 왼쪽 가슴이 반갑다는 듯 높이 손을 들었다. 엄격한 의미의 통증은 아니나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엔 영 찜찜한 느낌. 밖에서 비롯된 감각이 아니기에 더욱 의심스럽고 걱정스러웠다. 일상의 평범한 순간. 그러니까 저녁밥을 안치거나 머리를 털고 말릴 때 같이 지극히 평범한 순간, 가슴 안 쪽에서부터 울리는 느낌에 나는 민감해졌다. 막 잠이 든 아기의 뒷목에서 조심스레 팔을 빼낼 때, 뭔가가 욱신거리면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상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성큼성큼 제 갈길을 간다. 혹시나 이게 뭐 나쁜 징조라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아이, 엎드린 내 등에 마구 타고 오르고 그러다 내 볼에 축축한 입술을 함부로 들이미는 이 꼬마를 어떻게 하지? 소리 없이 흥건한 뽀뽀에 웃다가 '쪽!' 소리 내는 것을 가르쳐주니 이제 막 '쪽, 쪽' 소리를 내는 꼬마. 그러나 싱크가 맞지 않아 뽀뽀 다음 쪽, 뒤늦게 소리를 내는 이 꼬마를 어떻게 해야 하지.


애매한 일에 서둘러 결판을 내려하고, 미적미적거리며 견주고 재는 수에 미숙한 나는 이 명제 앞에선 마냥 주춤거린다. 급히 이야기를 내려 닫고 비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먼저 도달해 앞으로 받을 상처 앞에서 우쭐거리고 싶던 과거의 나는 이제 없다. 꼬마는 나를 한없이 연연하게 만든다. 삶에 미련 두게 만들고 그래서 질척거리게 만들고 구차하게도 만든다. 유아차를 미는 나는 마냥 냉철하거나 단호한 표정을 짓지 못한다. 애매하게 웃고 애매하게 기다리고 애매하게 빠져나온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한낮, 인도 위를 걸으면서도 차도 위의 차가 우리를 덮칠 가능성을 재보게 만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나 반대편으로 유아차를 꺾고 내 몸으로 감싸는 상상을 한다. 운동선수들이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자신을 단련하듯이 나도 매 순간 정진하는 셈이다. 우리는 고작해야 동네 놀이터로 향하고 있음에도. 그곳에서 우린 겨우 미끄럼틀 정도 타고 올 것임에도.


어젯밤은 내가 꼬마 옆에서 자기를 자청했다. 그럴 필요가 있어 보였다. 팔 아래 잠들어 있던 꼬마가 울음을 터뜨리며 잠을 깬다. 내복 상의를 벗겨놓아도 온몸이 불덩이 같은 아이가 밭은 숨을 훅훅 뱉는다. 그때마다 생생한 열기가 느껴진다. 안아 들고 방 밖으로 나가 물도 먹이고 해열제도 먹이지만 별 차도가 없다. 미지근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좀 닦아주려 하지만 그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울어댄다. 그저 안은 채로 집안을 서성일 수밖에 없다. 밖은 캄캄하고 가로등 불빛 아래 지나는 이도 보이지 않는다. 체온계로 계속 열을 재는데 39도를 넘고야 만다. 새벽 한 시 반, 세 시, 네 시, 그리고 여섯 시. 정수리부터 귓등, 뒷목과 허리춤, 손바닥과 발바닥까지 뜨끈뜨끈하다.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침대에 돌아와 눕히면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나도 그 옆에 몸을 구겨 넣었다. 자는 것도 깨는 것도 아닌 시간.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불침번을 서듯 나 앞으로의 삶을 검부라기처럼 초개처럼 쉽게 여기지 못한다. 많은 곳에서 주저하게 만들고 많은 것까지 내어주게 만든다. 이런 삶에는 어떤 태그가 붙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새벽이 가까워오도록 생각이 머뭇거렸다.




'바르셀로나와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는 바르셀로나의 박민아 님과 함께 2022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도시에서 8시간의 시차를 공유하며 한 달에 두 번 같은 주제로 에세이를 씁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알지 못하나 우리는 정말 즐거운 기대를 안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꾸준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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