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보내는 편지
숨이 차도록 달리다 정해진 바퀴수를 채우고 나면 바로 멈춰서 헉헉거렸다. 급히 나뒹굴듯 운동장 바닥에 주저앉고 싶지만 그럴 때 늘 주저하게 만드는 한 마디가 있었다. '달리기 마치고 바로 앉으면 엉덩이 커진대.' 대체 어디에서 어떤 연유로 만들어진 속설인지 모르겠으나 그 준엄한 한 마디는 열일곱들의 숨을 한 번 더 낚아챘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마른 먼지를 일으키며 뛰는 고등학생들. 결승점에 도달하고서도 행여 엉덩이가 커질까 두려워 상체만 굽혀 애꿎은 무릎만 짚었다. 고꾸라진 머리칼이 발아래 그늘을 드리웠다. 매미 울음이 아득했다.
그게 무슨 소리래. 근거 있어?
아무도 묻는 이 없었다. 안팎으로 자신을 단속하는 데에 익숙한 열일곱이었다. 늘 스스로를 살피고 단장하고, 매무새를 점검해야 했다. 교련이라는 과목이 아직 존재하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두툼한 붕대로 삼각건을 매는 수행평가를 치러야 했다. 이인 일조로 짝을 지어 교실 앞에 나와 선다. 교련 선생님 손엔 스톱워치가 들렸다. 쉬는 시간엔 척척 하고도 시간이 남던 게 스톱워치 앞에선 손이 헛돌았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누군가 붕대를 떨어뜨린다. 둥근 붕대는 도르르르 잘도 굴러간다. 굴러가며 교실 바닥의 모든 먼지와 때를 고루 묻힌다. 서둘러 붕대를 낚아채 다시 묶으려 애를 쓰지만 이미 글렀다. 이게 실전 상황이라면 상대는 패혈증 확정이다. 땅땅.
그러니까 우리는 유사시에 아마도 전쟁 같은 게 일어나면 이렇게 허술한 솜씨로 붕대를 묶게 되는 걸까. 하늘엔 포탄이 윙윙 날아다니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무엇이 들것에 들려 천막에 실려오면 어디를 찢고 어디를 째고 한없이 독한 알콜을 휘휘 뿌린 다음 붕대를 둘둘 감아줘야 하나. 끄트머리가 도르르 풀리지 않도록 제대로 비끄러매 묶어줘야 하나. 십오점 만점에
십점은 넘도록?
그때의 허술한 손놀림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정교하고 단단하게 스스로를 옭아맨 듯하다. 깜깜한 한밤 중 별을 헤듯 나는 나의 과오를 헤아린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저때는 왜 저랬을까. 밤은 깊어가고 나의 죄목은 장을 넘긴 지 오래다. 진정 반성을 위한 참회라기보다 왜 그때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했지, 단호하게 거절해도 되었잖아, 하는 후회가 넘실거린다. 나의 무르고 섣부른 실수들이 둥둥 떠오른다. 좋은 게 좋은 거다란 말은 누구보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다. 좋은 게 과연 좋았는가? 그랬을 리가 그럴 리가. 물론 앞으로도 절대 그러할 리가 없다.
따라서 묵은 달력을 넘긴 지도 한참인 4월. 그것도 만우절에서 하루 지난 4월 하고도 2일. 마침 어떤 계획이라도 세우기 딱 좋을 만큼 완연한 봄다운 날이다. 강둑의 부드러운 흙엔 뭐라도 자라나 있다. 삐죽한 가지 위론 봄꽃이 흐드러진다. 가까이는 가까이대로 멀리는 멀리대로 뭉게뭉게 어슴푸레한 봄기운이 일렁인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가볍게 또 가볍게. 엷고 또 엷게. 경하고 박하게. 짐짓 심각해지지 않고 원한을 묻어두지 않고 그저 내키는 대로 살리라. 새봄의 목련 아래선 인생에 대해 아니 생각할 수 없다. 피었던 목련이 기필코 낙하하듯 미래의 조각은 이미 도달해 있다. 낡고 더러워진 붕대를 자르기로 한다. 어지러운 사념들은 불사르기로 한다. 그것들은 원래 나풀거리기 좋아해 태우기도 쉽다. 보다 단순하고 진지하게 내 삶을 일구기로 한다. 고개를 돌리니 무심하게 돋은 쑥과 민들레가 보였다. 참으로 흔하고 귀해보였다.
'바르셀로나와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는 바르셀로나의 박민아 님과 함께 2022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도시에서 8시간의 시차를 공유하며 한 달에 두 번 같은 주제로 에세이를 씁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알지 못하나 우리는 정말 즐거운 기대를 안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꾸준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써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