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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Apr 15. 2022

#8 성장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

어린이집에  꼬마를 데리러 간. 유리문 너머로 나를 보자 말자 엄마, 엄마 숨도  쉬고 말하며 뛰어오는 꼬마. 뒤이어 나오는 선생님의 손엔 뭐가 주렁주렁 들려있다. '오늘 행사가 있어서 이걸 만들었는데, 사실 만드는 동안 잠이 들어버려서 제가 만들었지요.' 하며 건네주시는 것은 화분, 작은 수선화 화분이다. 이어 오늘의 어린이집 생활에 관한 짧은 브리핑이 이어진다. 오전에 울어재끼며 등원한 이후 계속 엉엉 울다가 다 같이 밖에 나가 수선화 심기를 하는 사이엔 유아차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으며, 그렇게 먼저 잠이  바람에 점심  다 같이  시간에는 잠들기를 거부하며 다시금 울었다고 한다. 계속해서 엄마, 엄마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 선생님. 정말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한사코 안기려는 23개월 꼬마를  팔에 안고 나머지 손엔 어린이집 가방과 대롱대롱 매달린 수선화 화분을 들고 일어선다. 이게 다라면 좋으련만, 아침에 타고 왔던 꼬마의 자전거도 함께 가져가야 한다.  모두를 컨트롤하기 위해 팔의 긴장이 느슨해지려 하면 바로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자기를 내려놓지 말란다.  안아주란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떨어져 있던 것을 만회하려는 것처럼  팔이  목을  붙든다. 벌린  다리는  허리를  감싼다. 12kg 거대 울음주머니와 가방과 화분, 자전거와 함께  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걸음 가다 끙차! 하며 꼬마를 추슬러 안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깨에 콧물을 마구 닦고 있는  느껴진다. 꼬마의 마음속엔 서러움, 슬픔,  같은  섞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를 어린이집에 데려가는 거야?  나를 두고 가는 거야? 같은 복잡하고도 단순한 마음.


물론 여러 번 설명한 덕에 머리로는 잘 이해하고 있다. '어린이집'이란 말을 들으면 바로 '엄마 엄마', '잉잉잉잉', '빠빠이', '까꿍'. 이 네 개의 단어가 줄줄이 흘러나온다. 풀어보자면 이렇다. 어린이집에 가면 엄마 엄마 하고 잉잉잉잉 운다는 거다. 문 앞에서 엄마랑 빠빠이 하고 헤어지기 때문이고. 그러나 놀다 보면 나중에 엄마가 까꿍 하고 온다는 것, 아마 어린이집 선생님이 마르고 닳도록 설명해 줬을 그 까꿍에 관해 꼬마는 진지하게 말한다. 그러면 종일 꼬마는 울기만 하는 모양일까? 싶지만 매일의 달라진 모습을 본다. 집에서 이제껏 가르쳐주지 않은 작은 제스처들이 곧잘 튀어나온다. 주먹 쥔 채 검지 손가락만 펴서 옆 이마께를 톡톡톡 짚는다.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멀쩡히 잘 치던 박수의 모양이 달라져 있다. 두 손을 가슴팍 앞에서 짝짝 치는 대신 쟁반으로 서빙하듯 하늘을 본 손바닥 위로 다른 손바닥을 철썩철썩 겹치며 박수를 친다. 응! 이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별개로 '대답해 주세요.' 말하면 '네에' 라고 답한다. 기저귀를 갈 때는 바닥에 철퍼덕 누워 매우 협조적인 자세를 취해준다. 또한 감기약 먹은 다음에나 상처럼 먹곤 하던 비타민 사탕을 매일 들고 귀가한다. 아마, 오늘도 많이 울고 불고 했던 모양이지. '비타민!' 하고 크게 외칠 때면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한다. 거기에 뽀로로와 크롱, 패티와 루피가 그려져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매일 선생님께 얻어먹어서 잘 아는 것일 게다.

지나가는 말이라도 허투루 생각하지 말고 자꾸 좋은 , 새로운 말을 들려주라고 엄마가 그랬다. 들어도 모르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게 들은 말들이 쌓이게 된다고. 엄마는 그걸 콩나물시루에 비유했다. 매일 물만 붓고 그 물이 다 흘러나가는 것 같지만 콩나물은 쑥쑥 자라게 되는 것처럼 꼬마도 똑같다고 했다.


그거야말로 좋은 말이네. 생각난 김에 화분들에 물을 주려고 물뿌리개를 꺼냈다. 그렇다. 뿌린 물이 다 흘러나오지만 다음번 물 줄 때 보면 알게 된다. 그사이 어딘가 마디가 껑충 자라 있고, 새 잎이 뾰족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다 못해 떨군 잎들 사이 숨어있던 잡초라도 조금씩 자라 있다. 아주 평범하고 진부한 감상이지만 이건 아름다운 일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 바람이 불었다 멎는 것, 비가 오다가 그치는 것, 그 세세한 변화들을 민감히 알아차리고 제 몸을 키우고 펴낸다. 이건 그냥 변하지 않는 맛으로 보는 거 아닌가? 싶었던 선인장들조차 작고 도톰하게 몸을 불리고 있다. 새로 난 가시는 어떠한가 싶어 슬쩍 건드려보니 허 참, 가시조차 아직 여물지 않아 보드라울 줄이야. 희게 빛나는 솜털 같다. 


솜털 같은 가시 말고, 진짜 희고 보송한 솜털. 역광으로 만나는 꼬마의 목덜미나 둥그런 볼엔 아직 그런 솜털들이 있다. 제 아무리 형아라고 우겨도 아직 내 눈엔 아기인 것은 그 때문일까. 허나 운다고 다 받아줄 수 없어, 운다고 다 해결되지 않아. 이런 모진 말을 하는 나다. 꼬마는 꼬마답게 눈물 콧물 쏟으며 발을 구르고 때론 바닥에 누워 꺼이꺼이 목 놓아 운다. 나는 주춤주춤 물러나 내 갈 길을 간다. 물론 천천히 느린 발걸음으로. 다섯 걸음에 한 번쯤 고개 돌려 쳐다보면서. 그러면 다시금 으앙 소리 지르며 원통함 한 스푼 더한 울음으로 일어나 나를 따라온다. 그제보다는 어제, 어제보다는 오늘. 하루하루 더 나아지지 않을까. 매일의 등하원길, 손목이 부서져라 끌어안고 다니며 이런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은 꼭 일기를 써야 한다. 삐죽거리는 얼굴, 입가는 실룩거리며 엄마 엄마 했으나 눈물은 나지 않던 오늘 아침. 선생님 품에 안겨 나에게 빠빠이 하며 손을 흔드는 아침. 잘못 건드리면 바로 울어버릴 거야 같은 기세로 뾰루퉁한 얼굴이었지만 대성통곡은 없는 아침. 나는 처음으로 덜 무거운 마음으로 물러날 수 있었다. 그동안은 매일이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이었으니까. 거대한 폭발, 몰아닥치는 화염과 연기, 파편과 비명이 날아드는 배경을 뒤로하고 몸을 굴러 탈출하는 느낌이었다. 필사적인 것은 피차 마찬가지. 고로 한결 온화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와 이렇게 노트북 앞에 앉았다. 우리가 울고 매달리고 껴안고 하는 사이 수선화는 이렇게 쑥쑥 자라났다. 내가 한 것이라곤 가끔 물을 주고 바람을 쏘여주는 것밖에 없었는데. 성실하고 튼튼하게 그러면서도 기세 좋게 피운 꽃을 만났다. 꽃 다 진 다음 흙 아래 묻어놓으면 새 구근을 만들어 내겠지. 그 무심한 '자연스러움'에 다시금 반하는 오후, 까치가 노래하듯 운다. 바야흐로 봄의 정점이다.




'바르셀로나와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는 바르셀로나의 박민아 님과 함께 2022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도시에서 8시간의 시차를 공유하며 한 달에 두 번 같은 주제로 에세이를 씁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알지 못하나 우리는 정말 즐거운 기대를 안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꾸준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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