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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May 02. 2022

#9 달리기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

해 아래 맨 얼굴, 자유로운 들숨과 날숨. 여기에 감격하다 깨닫고 만다. 무슨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다고. 핵전쟁 이후 오염된 지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소수의 자원으로 연명하다 결국 첫 번째 탐사대를 선발하게 된다. 조악한 훈련을 마친 그들은 천천히 벙커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쩜쩜쩜. 2022년 5월 2일.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첫날, 이런 상상을 했다.


그곳은 해발 몇 백 미터 이런 수식이 어울리는 동네였다. 대학교 캠퍼스 안에서 실외 에스컬레이터를 처음 보았다. 그 학교 학생도 아니건만 가끔 산 아래 도착하는 마을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할 때면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렸다. 몹시도 가파른 경사가 시작되면  깊고 깊은 우물에서 나를 끌어올리는 두레박이 떠올랐다. 두 발 굳건하게 발판에 붙이고 서 있거늘 자꾸만 등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손잡이 꼭 잡고서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여야 했다.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는 한 번 갈아타기까지 해야 해서 그때나마 잠시 숨을 돌렸다. 그곳은 구기동, 깊은 산골짜기 동네였으니까.


그러나 그 첩첩산중의 동네에서 대학교 운동장만큼 너른 평지는 또 없기에 나는 종종 그곳을 찾았다. 높은 곳이니만큼 경치는 기가 막혔다. 가장자리 난간에 가까이 가면 코 앞에 북악산이 잡힐 듯 보였다. 그 너머론 남산타워-이렇게 쓰면 옛날사람인-가 고요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아래론 낮은 지붕의 집들과 인왕산 자락을 파고드는 내부순환로의 터널이 보였다. 그리고 세검정과 석파정, 계곡물에 칼을 씻거나 아니면 술잔을 띄우기에 좋은 장소였다는 거다. 호연지기를 아니 기를 수 없는 풍광이었다는 이야기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으매 뛰지 않았다는 양반들처럼 좀처럼 달리지 않던 나. 횡단보도의 신호가 아슬아슬하게 바뀌려 할 때나 지하철 플랫폼에서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릴 때 정도 달렸던 나.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잎새님이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말에 솔깃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그럼 한번 달려볼까. 런데이 어플을 다운받고 트레이너의 음성 안내에 따라 달리기를 시작한다. 처음엔 아주 짧은 구간을 느린 속도로 달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도 얼마 뛰다 금방 걷기로 바뀐다. 느리게 뛰고 걷는다. 다시 느리게 뛰고 걷는다. 뭐야? 이게 다야? 할 정도의 난이도에서 시작해 나날이 속도와 거리를 늘려나간다. 이 어플의 최종 목표는 30분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처음에 듣고 허 참,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했지만 나는 결국 차근차근 거기까지 다다르게 된다. 중간에 멈추지 않고, 물을 찾지도 않고, 털레털레 발을 끌지도 않으며, 고른 페이스로 30분 연속 달리기에 성공한다. 처음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게 방해물처럼 느껴져 거슬렸다. 나와 반대 방향으로 달려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 난데없이 빙글빙글 도는 강아지, 모여서 캐치볼 연습을 하는 아이들 등. 그러나 나중엔 공중의 한 점, 남산타워의 불빛을 바라보며 뛰었다. 그 빛은 결코 흔들림이 없으므로.


매일의 땀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느낌, 그러면 이건 땀으로 만든 적분인가 싶었다. 나 원 참, 지나치게 건실한데? 자화자찬할 만했다. 몸으로 배운 영역들은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는가 보다. 한번 발돋움해서 큰 획을 그어놓으면 한참 지나서도 과거를 기억하는 느낌이다. 다소 바래고 볼품은 사라지나 그래도 잊지는 않고 있다. 몇 년이 지나 다시금 달리기를 시작하며 생각했다. 발목이며 무릎이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간 쓰지 않은지 오래인 만큼 정교한 집중력은 없지만 어설프고 둔탁하게나마 움직이고 있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따라 도는 것처럼 느리지만 두 다리가 엇갈려 나아가고 있다. 기록도 중요치 않다. 누굴 제치는가도 중요치 않다. 달리기의 원형, 발이 지표면을 밀며 나아가고 다른 다리가 관성을 이어받아 다음 자리를 밟고 뛴다. 상체는 꼿꼿하고 두 팔의 팔꿈치는 성실하게 공기를 가른다. 숨은 차고 몸은 더워진다. 배엔 남몰래 힘이 들어간다. 그러면서 달리는 몸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한다. 밀어내는 힘으로 도약하기. 무엇보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그리고 쉬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기. 내겐 그게 중요했다. 마스크 없는 세상에선 더더욱.




'바르셀로나와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는 바르셀로나의 박민아 님과 함께 2022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도시에서 8시간의 시차를 공유하며 한 달에 두 번 같은 주제로 에세이를 씁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알지 못하나 우리는 정말 즐거운 기대를 안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꾸준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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