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보내는 편지
남부 이탈리아나 몰타의 바닷가 마을, 역사 깊은 구도심의 골목은 좁디좁았다. 늘어선 돌벽 사이론 짙은 그늘이 졌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헤매다 거리 이름이 적힌 표지판을 찾으러 고개를 들면 그 좁은 하늘을 메우고 있는 빨래들이 보였다. 창문 밖으로 여러 겹의 줄을 매어놓고 오늘의 빨래들을 널어 둔 풍경. 그건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들 같았다. 티셔츠도 바지도 때론 속옷도 무심하고 당당하게 펄럭이는 가운데 유난히 알록달록한 빨랫줄들도 있었다. 우리 지금 막 바다에 다녀왔어요! 라고 외치는 듯한 수영복과 비치타월들. 쟤네 수영하고 왔나 보네. 그도 그럴 것이 좁은 골목에서 헤매다가도 작은 광장에 나오면 눈 닿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막 만들어진 싱싱한 구름들 사이로 갈매기가 낮게 난다. 먼바다엔 손톱만큼 작은 배, 가까운 바다엔 파도를 헤치며 뛰어드는 아이들. 색색의 파라솔 아래론 한평생 그렇게 몸을 구워온 듯한 할머니들이 누워 수다를 떤다. 역시나 색색의 수영복을 편히 풀어헤치고서.
그때의 그 여유를 넌지시 그리워했는데 이제 우리 집 베란다가 비슷한 풍경이 되었다. 알록달록한 수영복들은 개켜 서랍에 넣을 새 없이 늘 대롱대롱 걸려있다. 동네의 작은 물놀이터, 조금 더 큰 물놀이터, 그리고 한강변의 수영장까지 섭렵하는 사이 우리는 조금 더 용감무쌍해졌다. 처음엔 꼭 안겨 있으려고만 하던 꼬마는 점차 물을 헤치며 혼자 걷고, 만만하다 싶은 깊이에는 슬쩍 앉아보기도 한다. 턱 아래로 찰랑이는 물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튜브에 올라타면 자신감은 배로 강해져 슬쩍 당기거나 밀어줄라치면 새된 목소리로 '혼자! 혼자!' 외친다. 자기 혼자 할 수 있으니 놓아두라는 말이다. 그래, 너 혼자 놀아 봐. 하고 손을 떼니 바닥을 슬슬 밀며 저만치 멀어져 간다. 그러더니 헤헤 웃는다. 그 얼굴 뒤로 '수심 0.6m' 라는 표지판 글귀가 선명하다. 중력과 부력 거기에 독립심 같은 게 알맞게 어우러진 오후의 수영장이다.
읽으려고 들고 간 책을 몇 장 넘기다 스르르 잠드는 것은 너무나 전형적이다. 나는 그 전형성을 거부할 수 없어 얌전히 돗자리 위에 눕는다. 커다란 밀짚모자를 얼굴 위로 비스듬히 걸쳐놓으니 해도 잘 가리고 신원도 숨길 수 있어 안심이 된다. 발아래로 사람들이 들고 나지만 챙 아래는 적당히 어둑하고 아늑하다. 야! 끼약! 풍덩! 이런 소란들은 백색소음이 되어 낮잠을 거든다. 최승자 시인의 아이오와 일기 <어떤 나무들은> 덕에 짧고 단 낮잠을 잔다. 이렇게 쓰면 책이 지루한 것 같지만 몹시 재미있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이야기는 언제라도 환영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지고 다투고 흉을 본 이야기도 좋다. 마트에 가서 장을 봐다가 창의력을 발휘한 요리들을 해 먹는 장면들도 좋다. 도서관에 반납하고 나면 새 책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서 선물을 해야지. 그리운 얼굴을 생각하다 잠깐 잠이 들었다.
일어나 남은 시간을 다시 물속에서 보낸다. 매우 성실하게 40분 수영하고 20분 쉰다. 그 20분 사이 매점 줄은 길게 늘어진다. 줄이 빠지길 기다렸다 아이스크림과 컵라면을 하나씩 사 먹는데, 더위사냥은 3,000원에 진라면 큰 컵은 3,500원이란다. 뭐야! 가격이 2배는 넘는 거 같은데? 가격 앞에 노곤한 정신이 번쩍 깨는데 그런 이들을 위해 친절하고 단호한 문구가 붙어있다. '밖에서 사 온 라면 물값 1,500원', '외부라면 물 받기 금지', '마트에서 산 라면 편의점에서 물만 받는 것과 똑같습니다'. 특히나 마지막 문장에서 묘하게 설득되고 만다. 그래, 여기도 자릿값이니 이해합니다. 오랜만에 먹는 더위사냥은 찡하게 달고, 한 젓가락 뺏어먹은 라면 맛은 짜고 매콤해 사뭇 매혹적이다.
나는 한때 이런 순간을 위해 1년을 산다고 아니 버틴다고 믿었다. 퇴근을 하기 위해 출근을 하는 삶, 혹은 퇴사를 위해 입사를 하는 삶과 다름이 없었다. 여름의 수영장은 그 모두를 멀리 밀어놓고 휴식, 여가, 자유만을 상상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메신저 알림음도 파티션 너머의 기웃거림도 없다. 시시하고 사사로운 소문들도 그걸 여기저기 옮기느라 바쁜 입들도 없다. 여기는 구름과 해, 물과 나만 있는 곳이니. 발장구 열심히 치다 나와 썬베드에 눕는다. 발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개운하면서도 나른한 기분, 목을 축일 만한 가벼운 알콜. 거기에 읽을 책 한 권이면 더 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자유가 펼쳐졌다. 여름의 정점, 그 한순간의 기억에 의지해 1년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두 다리의 길이가 다른 콤파스로 뒤뚱거리는 것과 같았다. 이리저리 헛도느라 제대로 된 원을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많이 넘어지고 많이 뒹굴었다. 그때마다 아주 치를 떨면서 내가 속한 진창을 저주하며 분개했으나 그런다고 분노가 가시지는 않았다. '내가 저 쪽 방향으론 침도 안 뱉을 거야.' 이 고전적인 대사를 실제 내뱉기도 했으니 정녕 극적인 무대 위에 서 있던 셈이었다. 위험하고 아슬아슬했다.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그러나 불구덩이 밖으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몰랐다. 제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의 무서움은 지금껏 내 안에 살아있다. 다만 방향을 돌려 다른 쪽에서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일에 파묻혀 고되고 기진맥진했던 순간, 진짜 힘들었던 이유는 내가 참 외로워서였다고. 드물게 나한테 손 내미던 이들과 사적으로 어울리는 것은 연장근무처럼 여겨져 늘 달아나고자 했지만, 사실 나는 많이 외로워하고 있었다고. 그러면서도 곁을 내어주지 않으려 애를 쓰느라 더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다고. 달아나면서도 머무르고 싶었고, 모두 불태우면서도 간직하고 싶었다고. 그 이중적인 마음을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인정할 수 있었다. 가라앉는 힘과 밀어내는 힘, 나아가는 힘과 붙잡아두는 힘. 수면 밑의 발버둥과 수면 위의 느긋함. 그 조화로 내가 무사히 물에 뜰 수 있음을 그때는 몰랐다. 여기까지나마 도달한 것을 칭찬해줘야 할까. 늦은 깨달음에 탄식해야할까. 지나간 일에 대한 고민을 밀어두고 나는 시인의 이야기를 읽겠다. 시인의 시를 읽겠다. 시인의 책을 선물하겠다. 책장을 넘기다 문득 떠오르는 이에게.
'바르셀로나와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는 바르셀로나의 박민아 님과 함께 2022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도시에서 8시간의 시차를 공유하며 한 달에 두 번 같은 주제로 에세이를 씁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알지 못하나 우리는 정말 즐거운 기대를 안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꾸준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써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