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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 Aug 12. 2022

#15 여름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 편지

몬세니 산골짜기에서 바람이 불어옵니다.

8월 12일 아침.

오늘 최고기온 39도, 최저기온 21도.

그래도, 지금은, 이 아침만큼은 시원한 바람을 집안 한가득 마실 수 있는 평화로운 여름 아침입니다.


굳이 좋아하는 계절이 언제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분명 여름은 아닙니다.

몸에 땀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고 그 끈적한 땀이 옷과 찐득하게 붙는 느낌이 아마도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하는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부터 여름에 누군가 "야! 박민아" 하고 등짝을 때리며 아는 척을 하면 아주 심하게 벌컥 올라오곤 했죠. 끈적한 땀에 옷이 붙는 느낌을 끔찍하게 싫어하여 조심히 움직이고 있는데, 그 모든 나의 조심을 딱하고 박살 내버리는 자. 여름날 내 등짝을 치는 자. 나의 오버스런 울분을 어이없이 덮어썼을 자들이 하나 둘이 아닐 겁니다. 


땀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구슬땀을 흘린다'라는 경험을 해 본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젊었을 적 나에게 땀은 늘 끈적하게 몸에서 배어 나오는, 그러나 그것들이 구슬 맺혀 흐른 적은 없는, 배어 나오다 식어가며 끈적거리게 만드는 습기와 같은 것뿐이었기에, '구슬땀을 흘린다'는 표현은 개인적으로 생소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구슬땀을 흘리기 시작한 것은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도 한참 지난, 40이 넘어서였던 것 같아요. 젊었을 때는 운동을 해도, 땀이 흐르는 적이 없었는데, 늙어가니 땀구멍들이 허벌레 열리기 시작해서인지, 운동을 하면 도르륵 도르륵 땀이 흐르기 시작하더라구요. 작은 땀 구슬들이 송알송알  피어 나오기 시작해서 서로서로 어느 지점에서 만나서는 큰 구슬을 만들어 뚝뚝 떨어지면 그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땀이 끈적하게 배어 나오다 식는 그 찝찝함에 아주 상반되는 개운한 기분. 구슬땀을 뚝뚝 흘리는 기분이 좋아서 오래도록 운동을 하곤 했죠. 


바르셀로나의 여름은 가만히 있어도 구슬땀을 흘리기 딱입니다. 

더군다나 35-40도의 더위에 제가 일하는 곳은 불 앞입니다. 

진정한 구슬땀을 흘릴 수 있는 기회이죠. 러닝머신을 뛰지 않고도, 스쿼트 오십 개를 하지 않고도, 진정한 노동자의 구슬땀. 어쩔 때는 주문이 거의 나가고 나서 물을 한 모금 마시면 물이 짜더라고요. 뭐지? 하고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아보면, 땀 맛이더이다. 땀 맛. 하하하. 


어제는 이 노동의 구슬땀에 한 가지 보태서 식은땀까지 한 바가지 흘린 인생 경험의 날이었습니다.

바야흐로 8월 중순, 스페인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바닷가로 휴가를 떠나고 거리는 한가롭고, 뜨거운 태양만이 도로를 점령하는 때이죠. 저를 손발처럼 도와주던 팀들도 모두 휴가를 갔습니다. 치호는 일본으로, 라바는 프랑스로, 마르티도 스페인 어딘가로... 덜렁 남은 사람은 저와, 저의 딸, 그리고 마르티의 친구 베르타. 주방은 저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죠. 베르타와 딸은 주문과 서빙만으로도 벅찼으니까요. 그런데, 이 베르타 언니는 음식이 뭐가 나갔는지, 뭐를 더 해야 하는지,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나는 누군지, 여기는 어딘지 모르는 스타일이었어요. 늘 내 옆에서 사사삭 '민아, 오마카세 세 개 더하고, 지금 바로 야끼소바 빨리 해줘야 해' 하고 지침을 주던 마르티와는 거리가 먼 나라에 사는 언니인 데다, 내가 아닌 것 같은데? 하면 심지어 심하게 자신이 맞다고 우기는 스타일이었기에 베르타가 마르티의 대타를 뛰고 나서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주말. 예약을 많이 받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어찌어찌 받다 보니 예약이 두타임 모두 꽉 찬 저녁이었습니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준비를 했지만, 문제는 일을 쉽게 만들려고 도입한 새로운 시스템이었죠. 키친에 주문표가 딱딱 뜨지만, 우리가 다 만든 음식을 한 개씩 지울 수가 없어서 도대체 어느 테이블로 뭐가 나갔고, 뭐를 더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혼자 주방을 도맡은 나는 그걸 챙길 새가 없었고, 새로운 시스템이 낯선 베르타와 딸은 방황하기 시작했죠. 어찌어찌 거의 끝나긴 했지만, 뭔가 길게 늘어진 찝찝한 기분이 흐르고 있을 때, 딸이 어떤 손님에게 혼나는 모습을 목격했어요. "맛있게 드셨어요?" 하고 테이블 그릇을 치우려 하자, 그 손님은 '이런 걸 음식이라고 내놨냐. 메인 음식이 풀떼기 아니냐. 같이 밥을 먹으려고 왔는데, 한 개씩 따로따로 나와서 기다리다 지쳤다.' 등등의 불만을 쏟아내자, 어린 딸은 얼굴이 빨개지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제가 어린 딸을 보내고 그 손님에게 가서. ''손님,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어요? 제가 다른 음식을 해드릴꼐요"라고 하니, 그 손님은 나에게 남은 화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으며, 내가 오마카세로 준비한 미소된장소스 비빔국수에 얹은 야채를 젓가락으로 찔러가면서 풀떼기 올려준 게 무슨 메인 음식이냐  하며 화를 냈습니다. 고명으로 얹은 미소와 생강에 절인 고기 수육은 다 집어 먹어서 보이지 않았는데, 자기는 이런 걸 음식이라고 내는 게 어이없어서 손도 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의 딸과 아내도 옆에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둘의 그릇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지만, 그는 계속 소리를 높여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하며 다른 음식을 만들어 주겠다는 내 제안을 깡그리 무시하고 나가벼렸습니다. 


 그가 나가고 나자 남아있던  손님 하나가 갑자기 소리를 내서 말하기 시작했죠.  " 민아! 니 음식은 최고야. 니 음식이 맛없다는 건 그 사람 문제야. 나도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얼마나 이 풀떼기들을 맛있게 먹었는데! 내 빈 그릇을 봐!" 옆 테이블에 있던 손님도, "저 사람 굉장히 무례하고 이상한 사람이야. 네 음식은 정말 최고야. 우리는 이곳을 정말 좋아해" 하며 말하기 시작하자 남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말에 동참해서  자기들끼리 한참을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급기야는 모든 손님이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민아야, 네 음식은 최고야! 저 사람이 이상한 거지, 네가 잘못한 게 없어!" 남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소리치며 모두 박수를 짝짝짝 쳐주었습니다. 

나의 등에는 식은땀이, 얼굴에는 구슬땀이, 눈에서는 눈물이... 가지가지 흘러나왔죠.


모든 손님이 가고 나서 내 딸은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부모에게도 거의 싫은 소리를 한 번도 듣지 않고 자란 딸은 상대방의 심한 부정적인 반응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엉뚱하게도 이미 다 서빙이 끝난 야끼소바를 4개나 더 만들어야 한다고 우겨서 나의 시간을 다 써버리고 나서는 " 어? 야끼소바가 이미 다 나갔었네?" 하던 베르타는 본인의 실수가 하나도 대수롭지 않은 듯 배실배실 웃으며 테이블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설거지는 부탁해서 처음 온 옆집 소피아는 잠옷 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진주가 다섯 개씩 박힌 진주삔을 세 개나 머리에 꽂고 천천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천장에서 팽팽 돌아준 선풍기는 '내가 돌라고 해서 돌긴 하겠는데, 정말 나도 돌겠다'라고 외치듯 모양은 팽팽 도는데, 시원한 바람은 하나도 만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창을 활짝 열었습니다. 

시원한 바람은 일도 들어오지 않는군요. 

띵똥하고 알림이 왔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라는 평이 적힌 별한 개의 평점이 날아왔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8월 중순, 탁한 공기가 꽉 차있는 가게.

구슬땀 식은땀 모두 빼고 받은 평.

내가 말했잖아. 난 여름이 별로라고.

남은 야끼소바를 챙겨서 베르타와 소피아를 보내고 딸을 도닥여서 집으로 옵니다.


'이번 주말만 버티면 엄마가 온다. 아빠가 온다. 내 아들이 온다. 그리고 내 언니랑 형부랑 조카들이 오고

내 가족이 온다. 모두 내편! 그러면 나는 이 여름을 버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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