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단상

일상단상

by 한량

날씨 예보를 보며 다음 날 일정을 세운다. 한국에서 프린트해 온 캘린더엔 우리가 지내는 기간과 특별히 가 보고 싶은 곳의 목록들이 있다. 여기가 좋겠네 싶으면 구글맵을 켜 오고 가는 방법과 갈 만한 레스토랑, 그리고 그곳이 문을 닫았을 때에 대체할 수 있는 레스토랑도 찾아놓는다. 꼬마와 엄마, 둘을 모시고 하는 여행에선 이런 밑작업이 중요했다.


유아차를 밀고 Mnac-까딸루냐 미술관-앞까지 무사히 올랐다. 마침 야외 까페의 제일 좋은 자리가 비었기에 자리를 잡는다. 무엇을 시킬까, 나는 언젠가부터 아침 나들이에서 꼭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시작했다. 여행 전 6개월 넘게 커피를 끊었었는데 여기에 와서, 정확히 말하면 엄마와 함께 여행하면서부터 커피가 절실해졌다. 운 까페 솔로, 뽀르 빠보르. 에스프레소와 함께 나온 설탕을 절반 이상 부어 휘휘 젓는다. 잘 녹아든 설탕을 확인하며 첫 모금 넘기면 달고나 맛이 났다. 빈 속에 내려 꽂히는 카페인과 당. 이게 있어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의 발아래론 바르셀로나 도심이 펼쳐져 있다. 석상의 머리 위엔 언제나처럼 비둘기들이 앉아있다. 하늘엔 구름이 둥둥 떠 있고, 구름이 만든 그늘이 도심에 그림자를 남긴다. 거리의 악사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꼬마는 할머니 품에 안겨 재롱을 떤다. 둘은 코를 맞대고 뭐가 그리 좋은지 킬킬 웃고 있다. 엄마의 체력과 열정은 3살의 그것과 맞먹는다. 늘 허덕이는 내겐 경이로운 지경이다.


오늘 점심은 면, 그것도 따뜻한 면. 일본 라면을 먹기로 한다. 국수를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서다. 이곳에서 숙소 사이의 일식집을 열심히 찾아본다. 영업시간과 별점, 고객 후기도 꼼꼼히 확인해 본다. 그러다 괜찮아 보이는 일식집을 찾는다. 아, 여기는 버스 타고 지나가다 본 적이 있다. 좋아. 가 보자. 경로를 확인해 보니 대강 걸어갈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선다. 이곳은 산 중턱이니 계속 길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되니까. 선선한 산바람, 유아차의 규칙적인 진동, 꼬마의 눈엔 졸음이 밀려온다. 점심도 먹기 전 잠들면 이후의 일정이 다 꼬일 것이다. 내 발걸음은 빨라진다. 자,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슝슝 달려가자. 결론적으로 그건 좋은 선택이었다. 적당히 고픈 배로 가게에 들어선다.


일식집의 메누 델 디아-오늘의 메뉴-는 에피타이저와 라멘 그리고 음료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자 4피스와 삶은 풋콩, 미소라멘과 돈코츠라멘, 그리고 맥주 각 1병씩. 따뜻한 풋콩을 까먹는 재미에 꼬마는 한참 열중했다. 뜨뜻한 국물은 우리의 위를 촉촉이 적셨고, 숙주나 쪽파 같은 고명에 나는 먼 곳 고향을 떠올린다. 그런 훈훈한 기분으로 창 밖을 바라보니 거센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음? 음! 유아차 주머니엔 휴대용 우산이 하나 들어있었지만 그걸로는 택도 없어 보이는 빗줄기였다. 사람들은 급히 뛰어가거나, 가게의 처마 밑에 모여 비를 긋고 있었다. 그럼 택시라도 잡아타야 하나 했으나 숙소까지 거리가 영 애매하다. 과감히 속보로 걸어가길 택한 것은 아무래도 점심부터 마신 에스트레야 담 덕분일 것이다. 작은 우산은 유아차에 탄 꼬마 몫이 되었다. 엄마와 나는 우산 없이 비 아래 나선다. 빠른 걸음으로 유아차를 밀다 횡단보도를 만나면 구글맵을 빠르게 확인한 다음 지체 없이 걸음을 옮긴다. 용케도 꼬마는 손 안의 우산을 기울이거나 놓치지 않는다. 꼬마가 든 우산의 편의점 로고 위로 빗물이 튕겨나간다.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을 때, 엄마와 나는 쫄딱 젖었지만 꼬마는 보송보송 무사하다. 우리는 빗물을 털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이런 비가 그치고 나면 기온이 조금씩 떨어졌다.

발코니에 내려앉은 플라타너스 낙엽이 두 장으로 늘었다.


이제는 지도를 볼 것도 없이 익숙하게 찾는 동네마트다. 장바구니 팔에 척 걸치고 들어서면 어느 섹션에 무엇이 있는지도 대강 다 안다. 일용할 물과 맥주를 고르는 손이 신중해진다. 남은 날들을 계산해 보고, 우리의 소비량을 가늠해 장바구니에 담는다. 냉장고에 토마토가 몇 알 남았으니 부팔라 치즈를 사고, 반찬 겸 안주로 하몽 한 팩도 사기로 한다. 레몬맛 요거트도 사고 씨 없는 청포도도 산다. 복숭아와 사과도 한 꾸러미씩 산다. 마트에 올 때마다 자잘한 동전들을 처분하고자 하지만 웬걸, 언제나 조금 더 묵직해진 주머니로 돌아간다. 마트 로고가 크게 써진 다회용 백을 메어 조금 기운 어깨를 하고서.


서울은 제법 쌀쌀한 날씨라고들 한다. 선풍기를 창고에 넣고 여름옷을 정리할 시간이겠지. 두꺼운 이불과 양말도 꺼내야겠네. 이제야 올해의 연도가 익숙해졌는데 벌써 지난달보다 남은 달이 더 적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침 일찍 빵과 커피를 사러 동네 까페로 향하는 길.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얼굴들은 바닷가나 수영장에서 본 모습과 다르다. 어디에서나 출근길의 표정은 비슷한가 보다. 적당히 초연하고 어쩌면 통달한 얼굴들. 조그만 가방 멘 어린이들은 옹기종기 어린이집 앞에 모여든다. 선생님이 하나씩 반기며 손 잡고 들어가고, 부모들은 다시 바쁜 얼굴이 되어 발걸음을 옮긴다. 시계를 보니 오전 아홉 시. 문득 서울과 서울의 가장 소중한 곳, 꼬마의 어린이집이 떠오른다. 참 좋았지, 참 좋았더랬지. 따뜻한 커피 한 모금 마시며 서울 생각을 한다. 돌아갈 때가 머지 않았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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