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상진 Dec 22. 2020

신조어의 유혹

2020년 12월 22일

내게는 일을 할 때 약간 강박을 일으키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신조어에 대한 강박이다.


광고 대행사에 다니며 제안서를 많이 써서 그런지 신조어에 대한 강박이 있다. 특히 커뮤니케이션 전략 부분을 이야기하는, 업계 은어로 말하자면 '앞단 썰'부분을 쓸 때  새로워 보이고, 있어 보이는 말을 쓰려는 강박이 있다.


예를 들어 실무자 시절에 썼던 신조어 들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디지털 충동구매는 있어도, 충동기부는 없다.'
'칵테일파티 효과의 재해석. 소비자는 듣고 싶은 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좋은 제품이 좋은 후기를 만드는 시대에서, 좋은 후기가 좋은 제품을 만드는 시대로'
'브랜드 저널리즘을 넘어 브랜드 액셔니즘으로'


사실 신조어라고 말은 했지만, 새로운 문장이나 새로운 관점을 통한 재해석 같은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글이나 문서를 써야 할 때 꼭 있어 보이는 문장을 넣어야겠다는 강박에, 해당 문장 하나 만드는 것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편이다. 전체 제안서 문서 구성하는 시간의 절반 정도를 신조어를 만드는 것에 썼던 것 같다.


마케터들 중에는 이렇게 자신만의 강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내가 가장 많이 본 케이스는 PPT 문서 레이아웃에 강박이 있는 사람이다. 가운데 정렬, 줄 맞춤, 도형 간격, 줄 굵기 같은 것에 강박을 가진 사람이다. 또 어떤 사람은 세계 최초와 국내 최초라는 말에 강박이 있어, 아이디어를 어떻게든 쥐어짜고, 변형해서 국내 최초라는 말을 달고야 마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쾌감은 대단하다. 마치 유레카를 외치는 기분과 같으며, 남들을 찾아내지 못한 중력이라도 발견해낸 것처럼 들뜬다. 하지만 신조어에는 큰 단점이 있다.


나만 아는 말이라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굉장히 불편하다. 특정 사안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신조어까지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미션이 추가로 생기는 것이다. 주니어 시절 신조어와 관련해서 너무 많은 질타를 받은 탓에 이 정도로 완화된 것 같기도 하다. AISAS, 통섭 마케팅(CMC) 같은 신조어 만들어 보겠다고 난리 치다가 많이 혼났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이거다.


'똑똑한 척하려고 너무 애쓰는 것 같다'

'어려운 말 쓰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그런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갑을 관계의 입장에서 을로 오래 있다 보니 자꾸 무시당하고 싶지 않고, 똑똑한 척을 하고 싶었나 보다. 능력 있고 유능하다고 을은 전문가로 불리지만,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을은 그냥 귀찮은 일을 대신해주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단순히 신조어에 대한 강박이 아닌, 무시당하기 싫음에서 오는 강박 일수도 있겠다.


당시 회사에 계셨던 마스터님과 그룹장님에게 혼나고, 피드백을 받으면서 이 정도로 순화되었다. 설명이 많이 필요한 신조어는 되도록 만들지 않으려 노력한다. 한두 문장으로 이해시키고 공감시키는 정도의 문장이나 단어를 만드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렇게 보면 무시당하기 싫은 강박이 아니라, 신조어에 대한 강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려운 신조어를 만들고 나서 버리기 아까울 때 항상 이렇게 생각을 한다. TV에 나와 어려운 낱말을 뱉으며, 전문 지식을 뽐내는 사람들. 대화를 하지 않고 말을 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듣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만들어낸 어려운 신조어를 폐기한다.


사실, 쉽다고 생각하는 신조어도 대부분 어렵다. 새로운 것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 회사 네이버 포스트 콘텐츠를 직접 작성했었는데, 거기에 '팬덤 마케팅을 넘어, 팬덤 브랜딩을 한다'라는 문장을 썼다. '팬덤 브랜딩'이라고 나름 야심 차게 써봤는데, 좋아요가 없더라.. 아쉬웠다.


하지만 신조어 충은 오늘도 신조어를 고민한다. 뚠뚠.

매거진의 이전글 잘못된 건 없다, 못된 거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