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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Apr 01. 2021

시의적절한 위로

그 때 그 한마디

몇 년 전에 오래된 빌라로 이사를 했다.

전 주인은 연세가 많으신 부부였는데, 아내분이 무릎 수술을 하신 탓에 4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 집을 내놓으신 것이라고 했다.

20년을 아이들 기르며 산 집인데 건강 때문에 떠나는 것이라 아쉬움이 많으셨다.

이사 당일, 전 주인의 짐이 다 빠졌다는 연락이 와서, 이사를 도와주러 오신 아빠와 같이 올라가 보았다.

아주머니는 이 방 저 방 돌아다니시며 빠진 물건이 없는지 살펴보고 계셨다.

우리가 들어가니 각 방이며 옥상 열쇠를 담아놓은 유리컵을 건네주신다.


"이 집이 문도 크고 너무 좋아. 지금 저쪽 집 가보니까 우리 장이 문으로 안 들어가, 베란다로 넣었어."

아쉬운 것이 문뿐이랴,

자식들 기를 때처럼 방이 많은 집은 필요 없고, 노후 자금도 챙길 겸 더 좁은 집으로 이사하시느라 짐도 많이 줄이셨다고 한다.

들어올 때 보니 손때 뭍은 오래된 가구며 살림살이들이 쓰레기 스티커를 달고 잔뜩 쌓여있었다.

마지막으로 집을 돌아보며 눈물이 그렁하신 전주인 아주머니에게 나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 엉거주춤한 채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다시 가셔서 정 붙이고 사시면 또 괜찮습니다."

아빠가 말했다.


정 붙이고 산다. 아, 저 말이 지금 할 수 있는 말이구나.

어떤 말을 건넬지 어려운 순간에 어른들이 던지는 시의 적절한 말을 꼭꼭 기억해 놓는다.

나중에 이런 순간에 머뭇대지 말고 저런 말을 건네야지.




친척 어른 장례식장에 엄마와 함께 갔다.

아침에 출근하러 나갔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분이어서 가족들의 충격이 컸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도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웠다.

모든 죽음이 슬픔을 안고 있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사람의 장례식은   무겁다.

가까운 사람들이지만 문상을 하고 얼굴을 마주 보니 할 말이 없다.

매일 보는 사람도 그 자리에서 절을 하고 나서 마주 보면 처음 보는 사람 같다.

"어떻게 이렇게 허망해."

엄마가 말했다.

허망하다...

그래. 이 느낌은 허망한 것이다.

슬프고 먹먹한 마음보다 그렇게 갑자기 가버린 사람의 인생과 가족을 생각하니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이 기분은 허망함이지.




동료가 유산을 했다.

아기 가졌다고 좋아했는데 얼마 후 유산이 되어버렸다.

주변에 유산이 너무 흔해서 다들 그런가 보다 했지만 막상 그 동료가 회사에 복귀했을 때는 말을 건네기 힘들었다.

힘들었지? 기운 내. 금방 다시 생길 거야.

모두들 위로의 말을 건넨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인연이 아니야."

그렇지, 자식도 인연인데 다 오지 못하고 가버렸으니 그 인연은 딱 거기까지 인가보다.


몇 년 후 나도 유산을 했다.

결혼 후 바로 아이가 생겨 기뻤는데 아무 이유 없이 유산이 되었다.

조금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병원에 확인차 가보았더니 아기 심장이 뛰지 않았다.

수술을 하려고 병원 복도에 앉아있는데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주었다.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더 눈물이 났다.

"그거 니 새끼 아녀."

동료에게 "인연이 아니야" 말해주었던 예의 그 동료가 생각났다.

인연이 아니구나, 잠깐 왔지만 나를 통해서 이 세상으로 나올 수 없었던, 딱 거기까지만이 인연이구나.


아까 낮에 영화를 봐서 그런 걸까,

지난주에 산 신발이 너무 꽉 끼어서 몸이 불편해서 그랬던 걸까.

쇼핑을 하면서 너무 걸어 다녔나.

야근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지하철에서 오래 서있어서 그랬던 걸까.


아기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부터 시간을 돌려 유산이 된 원인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는데, 엄마의 말을 듣고 나니 옥죄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놓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애타는 죄책감이 사그라들었다.

그냥 내 자식으로 태어날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살면서 위로를 해주고 싶을 때가 많다.

가만히 들어주거나 안아주는 것이 가장 좋은 위로일 때가 더 많다.

그래도 고통을 알고 있다고, 힘을 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할지 몰라서 머뭇거릴 때 시의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싶다.

어른이 된다고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가끔 어르신들이 두런두런 하는 말씀 중에,

그렇지... 저 말이 필요하네.

싶을 때가 있다.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필요한 말을 꼭 하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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